동순태 (인천개항과 중국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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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순태 (인천개항과 중국상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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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식하고 발전했다는 것이다. 1894년의 청일전쟁은 동순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천 지점의 탄칭후가 탄제셩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5월 무렵부터 개전 조짐에 관한 소식이 늘어나 6월초 청국군대가 아산에 상륙하고 6월 중반 인천의 청국거류지까지 일본군이 가득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무렵부터 중국상인은 귀환을 개시하여 7월부터는 정기선 출항 때마다 수백 명씩 귀환했다. 탄제셩은 탄칭후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으려 했지만, 결국 약간의 연락원만을 남기고 산동성 옌타이로 피난했다.
그러나 동순태는 그 해 10월 무렵 이미 상하이와의 무역을 재개했다. 아직 전쟁 중이라 인천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항로는 중단되어 있었지만, 한일·중일간의 항로는 제3국 선박 등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에, 동순태는 나가사키와 코오베의 중국상인을 경유하는 형태로 무역을 재개한 것이다. 동순태가 정치적 환경변화에 관계없이 중국상인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유연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동순태는 한국 최대의 중국상인으로서 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자 동순태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했다. 일본공업제품을 우선하는 관세정책이 명확해짐에 따라 국경을 초월한 자유로운 무역활동이 점차 곤란해진 것이다. 1929년 탄제셩이 사망한 뒤 동순태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1931년의 배화운동을 거쳐 1937년 마침내 동순태는 폐점했다. 세계적인 자유무역의 파도가 한국을 뒤덮은 것과 동시에 시작된 동순태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자유무력의 종언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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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5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8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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