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과 영웅, 그 중심에 선 인물 - 연개소문(淵蓋蘇文)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역적과 영웅, 그 중심에 선 인물 -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역적과 영웅, 그 중심에 선 인물
연개소문


머리말

서론

본론
 연개소문의 출생
 반란 그리고 대막리지로의 집권
 단순한 쿠테타인가 군사정변인가
 긴장감이 가득했던 7세기 동북아시아
 당의 침략에 대비했던 천리장성
 강경일변도의 대당정책
 고구려 운명의 결정적인 시점,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말기인 614년부터 중국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돌궐의 침입 등 극도로 혼란했을 당시에 고구려는 을지문덕, 연자유 등 명장들이 있었다. 만약 영양왕이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고구려가 역사의 중심이 되지 않았을까? 영양왕 뒤를 이른 영류왕이 즉위한 618년에는 수가 망하고 당이 건국된 해이다. 당은 이 때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각지에는 군웅이 할거 하고 있을 정도여서 이 모든게 안정화된 시기가 624년이다. 영양왕 때처럼 영류왕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그 시기, 내부적인 상황에 치중해 전쟁으로 훼손된 농경지 복구 등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고구려 후기는 귀족의 권한이 막강한 귀족연립정권으로 왕권은 약하고 소수의 귀족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이었고 연개소문도 소수 가문 중 하나였다. 아마도 영류왕은 온건파와 손을 잡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 같다.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은 그럼 점이 불만이었을 것이고 영류왕과 온건파귀족들은 젊은 나이의 혈기왕성한 연개소문을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 자신이 죽느냐 마느냐의 상황에서 혁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고 당에 맞서 싸운 연개소문이 중국인들에게는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비춰지기까지 하는데 아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지나(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외 7리지의 황량대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ㆍ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과 하간현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이다.“
이렇듯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위협적인 존재인 동시에 고구려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연개소문이, 후대에 와서 고구려의 멸망과 같이 거론될 때에는 그에게 책임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에서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고구려가 지속되지 못한 것을 그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것은 연개소문에 대한 지나친 바람이 아니었을까. 분명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전쟁을 하면서 국토가 황폐해지고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도 많이 궁핍해졌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죽음은 고구려의 구심점을 상실케 함으로써, 고구려사회가 동요될 수 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직위를 맏아들 남생에게 계승하였는데 당의 첩자들로 추측되는 자들이 남생의 나머지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결국 그들을 분열 시켰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과 당의 계략으로 형제들의 갈등과 불신은 고구려를 멸망키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형제들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후방 식량보급 같은 국외적인 상황까지 결합되어 일어난 것이고 그 화살이 연개소문에게 돌아가야만 할까. 고구려의 멸망은 어떻게 보면 운명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고구려의 영원한 지속이라는 기대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연개소문은 전쟁에 있어서 훌륭한 지도자였다. 연개소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으로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왕(영류왕)이 적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으로 한 때를 구차히 지내고자 하므로, 연개소문이 간청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끝내 신의가 없이 몇몇 간신들과 같이 모의하고 공손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서 적국과 내통한 후에 그를 해치고자 하니, 이에 국가가 중요하고 임금음 가벼운 곳이기에 왕의 목을 베어 장대를 높이 달고 온 나라에 호령함은 크롬웰과 같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이다.”
아시아지역을 홍익인간이념으로 지도했던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자주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선비족의 나라 당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영류왕의 사대외교노선에 반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북방유목국가들을 활용하여 당나라를 견제하여 고구려를 지킨 연개소문의 애국애족적인 투혼이 자랑스럽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유로 고구려 역사 없애기에 급급하고 있다. 미국을 중국을 견제하는 국가로 활용하고, 동북공정같이 역사왜곡을 통하여 팽창하는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서 연개소문의 포위, 압박 외교는 지금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강한 외세에 아부하며 국익을 저버리면서 존속하려는 자들과 달리 연개소문은 당을 상대로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거부하지 않았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일궈냈다. 이렇게 7세기 중엽 바람 앞 등불과 같았던 고구려의 마지막 불꽃을 지키고,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하면서 대국에 승리했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으며, 삼국은 말할 것도 없이 저 멀리 중원의 변경과 사마라 칸트에 이르는 먼 곳까지 외교적 역량을 펼친 당시 시대에 연개소문에게 숨어 있는 노력과 조국애는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실의 역사라는 사실을 1300 여년이 지난 지금 21세기 후세들이 알아야 한다고 본다.
참고문헌
고구려사연구, 노태돈
한 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임병주
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웅진출판사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이덕일
‘조선상고사’, ‘독사신론’ , 신채호, 일부발췌
‘삼국사기’, 김부식
참고자료: KBS 역사스페셜 16회, ‘연개소문은 왜 투르크에 사신을 보냈나’
  • 가격4,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03.16
  • 저작시기2014.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0818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