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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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예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란군 토벌성공
로마 정부는 기원전 72년 안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그 해의 집정관 둘 다 반란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두 집정관은 각각 2개의 군단 1만 5천 명씩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와 개별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크릭수스에 대해서는 가르가노산(Mt. Gargano)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막다른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도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크릭수스는 전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추격을 교묘히 따돌리면서, 4만 명의 동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북상했다. 집정관 두 명이 이끄는 4개 군단은 이들을 추격하여 피체노 근처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따라잡았다.
6. 스파르타쿠스의 전략적 승리와 알프스로 북상 후, 다시 남하
스파르타쿠스는 4개 군단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않고, 집정관 한 명이 이끄는 2개 군단과 맞붙어 격파한 다음, 다른 집정관이 이끄는 2개 군단을 급습했다. 그 후에도 계속 북상하여, 루비콘 강 근처에서 갈리아 총독의 지휘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고 있던 군대와 만나자 이들도 격파해 버렸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쿠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지만, 갑자기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아마도 알프스 너머의 미개하고 가난한 땅으로 가는 것 보다는 물산이 풍부한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자는 부하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7. 스파르타쿠스의 남하와 마지막 전투
4만 명의 노예군은 도중에 만나는 도시나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이탈리아 남쪽에 도착했다. 그는 메시야 해엽을 건너 시칠리아로 가기 전에, 법무관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 군단 5만 명의 로마군과 또다시 싸워 이겨야만 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큰 희생은 아니었지만 크라수스가 패배하였다. 크라수스는 첫 번째 전투에서 적에게 등을 돌리고 달아난 1개 중대를 처벌하도록 했다. 전군에 대한 본보기로, ‘10분의 1형 이것은 600명의 중대원 가운데 10명 중에 1명씩 뽑힌 사람들 60명을 놓고, 뽑히지 않은 540명이 몽둥이를 휘둘러 60명을 죽이는 끔찍한 형벌이다. 로마 군단에서는 총사령관에게 반기를 든 경우에만 부과되는 엄벌이었다.
’을 언도했다. 이것으로 병사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는지, 메시나 해협을 건너려 하고 있던 노예군을 산속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이 산악지대는 아스프로몬테(험한 산)라고 불릴 만큼 험한 곳이다. 오늘날도 이곳에 들어간 범죄자들을 수색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파르타쿠스와 4만 명의 노예군은 다시 산을 내려왔다.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과 협정을 맺고, 그들이 브린디시에 보내주기로 약속된 선단을 이용하여 소아시아로 달아날 작정이었다고 한다.
산악지대에서 내려온 노예군과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에서 완패한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6천여 명은 십자가형을 받았고, 크라쿠스의 명령에 따라 아피아 가도 연변에 줄지어 세워 죽였다고 한다.

*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몇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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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4.10
  • 저작시기2014.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1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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