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강의] 고려와 몽골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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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중세사 강의]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고려와 몽골의 전쟁>

전쟁을 보는 시각(이 부분의 속성을 주의 깊게 보자)

무신정권이 무너지는 과정과 원지배가 일어나는 과정과 원간섭기에 일어나는 문제들

본문내용

항쟁의 연장으로 볼 수 없다. 삼별초가 아니라 삼별초에 호응한 많은 백성들이 대몽항쟁에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시스템이 독특하다. 부마국이라고 하는 것은 사위가 되는 것 분명 원의 지배를 받는데 고유한 국호는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원갑섭기라고 이야기 하지만 원지배기이다. 원제체안에 있지만 독립적 전통은 유지해준다. 세조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호풍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쿠빌라이는 고려태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대가로 원종에게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 이른바 ‘불개토풍’의 원칙이었다. 당시 정복한 국가의 제도나 문화를 모두 몽골 식으로 바꾸었는데 고려에게는 제외해주었다. 이것이 고려가 망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였다. 다만 원나라에 대한 사대는 관계는 거슬리는 부분만큼은 허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노비제도개혁이 있었는데 부모 가운데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고려의 노비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원나라가 개혁하려함. 고려지배층은 세조의 약속을 내세우며 거부함,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음. 이 약속을 ‘세조의 옛 제도’라는 의미로 ‘세조구제’라고 부르기도 함. 또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사이의 혼인이 있었다. 고려는 유일한 예외 지역으로 행성을 두고 부마국이 되었다. 원종은 즉위 후 친조를 위해 원나라에 갔을 때 몽공황실과 고려황실의 결혼을 요청했다. 몽골황실의 힘을 등에 업고 그 동안 무신정권에 눌려 있던 왕실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의도 였다.쿠빌라이도 받아들였다. 이것의 의미는 사위, 외손으로 몽고의 일원이 되는 것이고 독자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국왕을 혈연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고려를 통제, 억압하기 위한 장치임. 오랜 기간 저항해온 고려를 힘으로 누르기보다는 적절히 구슬려 복종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의 결혼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여져 이루어진 것. 고려국왕의 정체성은 말그대로 고려국왕이고 동시에 원황실의 일원이었다. 대개의 경우 정치적 권위의 기반을 원에 있다고 본다. 특히 충선왕은 원황제의 외손자였다, 고려국왕은 부수적 역할이었다.
부마국체제에서 고려국왕은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존재이다. 고려 국왕의 행보는 고려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안에 종속되어있다. 원황실일원이다.몽고안에 있으면서 자주성을 가지고 있는 이중적 구조이다. 고려국왕과 원황실일원 중 더 본질적인 것은 실질적으로는 원의 지배아래에서 규정되었으므로 원황실일원 쪽이 더 본질적이다. 충선왕,충렬왕 등 이 왕위에 다시 오르는 현상으로 증조현상이 일어남, 두 번 즉위함. 왕위에 두 번 오르는 것. 후계자 설정도 이 시기의 고려국왕은 자주적으로 통치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몽고에게 고려를 통치하도록 임명받은 존재였다. 극단적인 예로 충선왕이 있었다. 아예 고려에 있지 못하고 쿠빌라이의 외손자 고려국왕은 그가 수행하는 하나의 역할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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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03
  • 저작시기2014.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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