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설계론 서양도시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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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시설계론 서양도시의 변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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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 이 무렵에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이 바뀌고 관개시설이 파괴됨으로써 대지는 사막으로 변하고 마침내 우르에도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 같다. 우르 유적을 통해 얻은 완벽한 기록은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우르의 역사, 주민의 생활관습, 직업, 예술에 관한 지식은 거의 완벽하며 매우 상세하다.
* 지구라트 (ziggurat)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신전탑.
BC 2200~500년의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주요도시의 특성을 나타내는 종교적 건축 구조물로, 내부를 진흙 벽돌로 채우고 외부를 구운 벽돌로 덮었다. 안에는 방이 없으며 보통 기단은 길이가 각각 50m인 정4각형이거나 세로 40m, 가로 50m의 직4각형이다. 지금까지 약 25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으며 수메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유적에서 거의 같은 수가 발견되었다. 원상태의 높이만큼 보존되어 있는 지구라트는 하나도 없다. 원래는 밖으로 낸 3개짜리 계단이나 나선형 통로를 통해 올라가도록 했으나 발견된 지구라트 가운데 거의 반수는 올라갈 수 있는 어떤 길도 찾아볼 수 없다. 경사 부분과 테라스를 종종 나무와 관목으로 조경해 바빌론의 공중 정원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는 우르(지금의 탈알무카이야르)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것은 엘람의 초가잠빌에 있는 것으로 길이가 각각 102m인 정4각형 기단에 높이는 24m인데 그것도 원래 높이의 반으로 추정된다. 전설상의 바벨탑은 일반적으로 바빌론에 있는 마르두크 대신전 지구라트로 여겨진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 BC 2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 (현재)
지구라트
지구라트
* 팔마노바
팔마노바
별 모양의 도시
* 콘스탄 티노플(Constantinople)
-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는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꾸기 전의 원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 그리스어 Bυζαντιον)이었다.
콘스탄 티노플
* 역사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메가라 출신의 비자스(Byzas)라는 사람이 창건했다고 하며,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동방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비잔티움은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했다. 당시 비잔티움에는 천험의 지형과 많은 수의 함대와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군사와 백성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동안이나 농성했다. 때문에 도시가 함락된 후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조치로 페린투스(Perinthus)시의 일부로 격하되었다. 이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메세 가도가 놓여졌다.
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이후의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의 반격을 받아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의 포위공격으로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내전이 종결되어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을 완전히 통일하려는 콘스탄티누스의 맹공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맏아들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2일간의 전투 끝에 130척의 배와 5천의 병사를 수장시킨 것이 급격히 전세를 반전시켰다.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비잔티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결과 선정된 도시가 비잔티움이었다.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을 통해서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있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또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았다. 당시의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8년부터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해졌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의 황제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로마시에서 완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 이 도시의 이름을 "새로운 로마(Nova Roma)" 로 부르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한 이래, 이슬람화이전까지 기독교(동방정교회)문화의 꽃이 피어서 지금도 정교회 성 소피아 성당에는 화려한 성화(이콘)들이 남아 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는데 이슬람과 불가르족등 여러 야만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천혜의 자연적 조건으로 난공불락인 이 도시는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침공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라틴인들에게 함락되었다가 57년 만인 1261년 미카엘 8세에 의해 탈환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참조) 이 도시를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오스만투르크 치하에서는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으나, 서구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의 방어로 저지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i Poli, "도시")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존속했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최대의 도시였으며, 제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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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3
  • 저작시기2014.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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