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3·1운동의 전개> 31운동,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독립선언서, 만세운동의 시작, 전국의 만세시위운동, 해외의 만세시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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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3·1운동의 전개> 31운동,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독립선언서, 만세운동의 시작, 전국의 만세시위운동, 해외의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2. <독립선언서>준비 및 배포와 최후의 회담

3. 만세운동의 시작

4. 전국의 만세시위운동
 1) 북부지방의 3.1운동
 2) 중부지방의 3.1운동
 3) 남부지방의 3.1운동

5. 해외의 만세시위운동
 1) 중국의 3.1운동
 2) 러시아의 3.1운동
 3) 미국의 독립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합 전선을 구축한 점에서 국외 3·1운동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고 그 방법도 무장 투쟁을 겸한 실질적인 독립운동방략을 제시한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고 평가된다. 한민족독립운동사 (3) 3.1운동, 국사편찬위원회, 시사문화사, 1988, 406-454쪽
2) 러시아의 3.1운동
러시아 연해주 방면의 수십만 한인도 3.1운동에 헌신하였다. 1918년 말 대한인 국민회로부터 하리강화회의에 관한 통보를 받은 재노 한인들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간도 및 노령 지방 한인 대표자로서 윤해고창일을 선출해 1919년 2월 5일 파리를 향해 출발케 했다. 또한 해외 동포의 통합 기구로서 한족 상설 회의를 대한 국민 의회로 개편하여 연해주와 인접한 간도 지방에서의 조국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삼았다. 이 회합에서 국내외를 통한 일대 시위운동이 기획되었으나, 3월 1일 국내에서 시위 운동이 일어나고 간도 교포도 봉기하자 연해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대한 국민 의회 주최로 3월 17일을 기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큰 독립 시위를 전개하여 연해주 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대한 국민 의회에서는 러시아 당국에 아무런 사전 통고도 하지 않고 3월 17일 오후 4시 블라디보스톡 주재 11개국 영사관 및 연해주 당국에 국민회의 명의의 독립 선언서를 배부하고 일제 총영사관 및 주둔 일군 사령부 앞을 통과하면서 보다 열띤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 총영사는 러시아 요새 사령관에게 즉각 시위운동을 제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외교 분쟁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은 오후 7시 반에 시위운동을 중지하도록 하고, 신한촌의 태극기를 모두 내리고 시위 학생 2명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분격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18일 동맹 휴업을 감행했으며, 학생들은 휴교에 돌입하였다. 같은 3월 17일에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다수의 교포들이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며, 1백여 명의 청년들은 라즈돌리노예에서 계속 시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출발했다. 18일에 스파스고예에서는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역시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러시아 관헌의 원조를 얻은 리노예에서, 4월 5일에는 녹도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등 연해주 각지에서 시위운동이 계속 전개되었다. 증보 3.1운동사, 윤병석, 국학자료원, 2004, 88-89쪽.
3) 미국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9일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는 상해 현순 목사로부터 3.1운동의 제1보를 들었다. 그는 이승만정한경, 대한국민회 각 지방회와 서재필 등에게 이 소식을 전파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영자신문에도 전보 복사문을 돌렸다. 오후 7시 30분 대한국민회중앙총회가 한인교회에서 열리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정한경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할 것, 미국 각 교계와 단체에 교섭하여 대한 독립에 대한 동정을 얻을 것 등을 결정하였다. 하와이 국민회에서도 현순 목사로부터 독립운동의 발발소식을 전해 받고 한인교회에 600명이 모여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3월 13일 안창호는 대한국민회 중앙총회 석상에서 첫째 피를 흘릴 각오를 할 것, 둘째 민주 한인의 책임은 미국 여론을 일으키는 것임, 셋째 미주 한인의 최대 책임은 재정공급에 있으므로 수입의 1/20 이상 납부하도록 할 것 등을 선포하였다.
김정진은 63일에 걸쳐 서부 10개 주를 순방하며 63개 지방 동포 327명으로부터 의연금 1만 달러 이상을 모았고, 5월 26일까지 중앙총회는 3만 388달러 25센트를 모았다. 당시 한인들의 하루 임금이 3달러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주간으로 발간하던《신한민보》는 3월 20일부터 격일간으로 발간하며 고국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부터 16일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에서는 자유한인대회가 열렸다. 약 150여 명의 한인과 미국인 목사, 유대교 랍비, 대학 총장이 참석하였으며, 서재필이 의장을 맡아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일제의 억압과 착취의 실상을 알리며, 한국독립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환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충성을 선언하며, 각국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서재필은 그 동안 한국민족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으나, 3.1운동의 발발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주관하에 한국통신부를 조직하여 미국사회에 한국 실정을 알리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우선 각종 선전 자료로서《한국평론》 《필라델피아 대회 의사록》《한국의 독립》《한국의 어린 만세 순교자들》《한국에서의 일본의 흉포》《한국의 독립운동》들을 간행하였다. 한편 1919년 여름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선교부에서《한국의 사정》이 발간되어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의 실상이 공개되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미국 기독교계의 관심을 환기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서재필은 또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다수의 미국 유지로 간부진과 이사진을 구성하여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효과적으로 알리기에 힘썼다. 이 친우회에서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게 하였으며,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회원이 1만 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한국사 47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국사편찬의원회, 탐구단문화사, 2001, 403-404쪽.
참고문헌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4
한국사 47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국사편찬의원회, 탐구단문화사, 2001
증보 3.1운동사, 윤병석, 국학자료원, 2004
한민족독립운동사 (3) 3.1운동, 국사편찬위원회, 시사문화사, 1988
독립운동총서[2] 3.1운동,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 민문고. 1995
알기쉬운 獨立運動史, 박성수, 國家報勳處, 1995
3.1독립운동과 민족의 자존, 장백일, 2000년 창권 239호, 현대사회문화연구소, 2003
3.1운동과 민족의 자존-3.1절 84주년에 부쳐-, 장백일, 2000年 통권 239호, 2003
강좌 한국근현대사, 역사학연구소, 풀빛,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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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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