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1. 정조 즉위 초 규장각의 강화와 배경
(1) 규장각의 강화
(2) 규장각 강화의 배경과 이유
2. 규장각의 직제와 역할
1. 규장각의 직제
(1) 각신(閣臣)
(2) 잡직(雜織)
(3) 이속(吏屬)
2. 규장각의 역할
3. 초계문신 제도의 성립과 목적
4. 초계문신제도의 교육
(1) 강제규정
①시강
②시제
(2) 친림
(3) 초계문신제도로 배출한 인물들
나가며
1. 정조 즉위 초 규장각의 강화와 배경
(1) 규장각의 강화
(2) 규장각 강화의 배경과 이유
2. 규장각의 직제와 역할
1. 규장각의 직제
(1) 각신(閣臣)
(2) 잡직(雜織)
(3) 이속(吏屬)
2. 규장각의 역할
3. 초계문신 제도의 성립과 목적
4. 초계문신제도의 교육
(1) 강제규정
①시강
②시제
(2) 친림
(3) 초계문신제도로 배출한 인물들
나가며
본문내용
의는 매달 10일전과 15일후 두 번 하되 이문원에 설행하며 빈청강례에 따라 승지가 나아가 감시하고 접목을 정리해 입계 했다.
②시제
시제의 종목은 처음에 논(論), 책(策), 표(表), 배율(排律), 서(序) , 기(記) 등 여섯 종류였으나 차츰 그 수가 늘어나 최종적으로 30종목으로 정착 규정되었다. 이 30종목의 시제 중에서도 논과 책을 가장 중요시 했는데 그 이유는 치용(致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 116쪽.
시제는 매달 20일 이후 한번씩 실행 하였다.
(2) 친림
친림은 정조 자신이 직접 초계문신의 강제에 행차하여 시강과 시제 강의와 시험(친시)를 주관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힘과 동시에 연소한 문신들의 학문을 격려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친시는 매달 초하루에 친강은 매달 20일에 내각에서 어느날 거행할 것인지 왕에게 품하고 왕이 친림하겠다는 명을 내리면 왕지를 얻어 날짜를 정한다.
(3) 초계문신제도로 배출한 인물들
정조 5년 『초계문신강제절목』이 만들어진 뒤로 정조 24년 세상을 뜰때까지 거의 매달 강제가 실시 되었고 시험은 163회가 치러졌다. 시험결과에 따라 엄격한 상벌속에 초계문신들은 단련되었다. 10회에 걸친 초계문신은 모두 137명인데 이들은 다수가 정조의 근시기관인 규장각의 각신으로 등용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 정약용, 서유구 1764(영조 40)-1845(헌종 11) 조선후기의 문신. 관찰사, 이조판서,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농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 이서구, 이덕무·박제가·유득공과 함께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었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같은 실학자와 순조의 장인이 되는 김조순 등이 있다.
나가며
앞서 서술한 규장각의 강화와 초계문신제는 정조 자신의 약한지지 기반을 다져줄 친위세력 내지는 근왕파를 이룰 인재양성의 목적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홍문과 및 예문관 승정원등의 기관들의 기능을 흡수해 규장각으로 권력을 일원화 시켜 강화했다. 동시에 참외가 낮고 나이가 젊은 유망한 문신들을 초계문신제를 통해 재교육을 시켰고 이러한 과정을 거친 초계문신 출신들은 대다수가 규장각의 각신 혹은 공경대부 벼슬이나 작위가 높은 사람을 뜻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가 되어 정조의 개혁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규장각의 강화와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펼친 개혁정치의 크게 이바지 했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 참고문헌 ※
김문식,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
한영우, 「문화정치의 산실 규장각」, 지식산업사, 2008.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19세기」, 신구문화사, 2009.
②시제
시제의 종목은 처음에 논(論), 책(策), 표(表), 배율(排律), 서(序) , 기(記) 등 여섯 종류였으나 차츰 그 수가 늘어나 최종적으로 30종목으로 정착 규정되었다. 이 30종목의 시제 중에서도 논과 책을 가장 중요시 했는데 그 이유는 치용(致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 116쪽.
시제는 매달 20일 이후 한번씩 실행 하였다.
(2) 친림
친림은 정조 자신이 직접 초계문신의 강제에 행차하여 시강과 시제 강의와 시험(친시)를 주관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힘과 동시에 연소한 문신들의 학문을 격려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친시는 매달 초하루에 친강은 매달 20일에 내각에서 어느날 거행할 것인지 왕에게 품하고 왕이 친림하겠다는 명을 내리면 왕지를 얻어 날짜를 정한다.
(3) 초계문신제도로 배출한 인물들
정조 5년 『초계문신강제절목』이 만들어진 뒤로 정조 24년 세상을 뜰때까지 거의 매달 강제가 실시 되었고 시험은 163회가 치러졌다. 시험결과에 따라 엄격한 상벌속에 초계문신들은 단련되었다. 10회에 걸친 초계문신은 모두 137명인데 이들은 다수가 정조의 근시기관인 규장각의 각신으로 등용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 정약용, 서유구 1764(영조 40)-1845(헌종 11) 조선후기의 문신. 관찰사, 이조판서,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농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 이서구, 이덕무·박제가·유득공과 함께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었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같은 실학자와 순조의 장인이 되는 김조순 등이 있다.
나가며
앞서 서술한 규장각의 강화와 초계문신제는 정조 자신의 약한지지 기반을 다져줄 친위세력 내지는 근왕파를 이룰 인재양성의 목적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홍문과 및 예문관 승정원등의 기관들의 기능을 흡수해 규장각으로 권력을 일원화 시켜 강화했다. 동시에 참외가 낮고 나이가 젊은 유망한 문신들을 초계문신제를 통해 재교육을 시켰고 이러한 과정을 거친 초계문신 출신들은 대다수가 규장각의 각신 혹은 공경대부 벼슬이나 작위가 높은 사람을 뜻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가 되어 정조의 개혁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규장각의 강화와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펼친 개혁정치의 크게 이바지 했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 참고문헌 ※
김문식,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
한영우, 「문화정치의 산실 규장각」, 지식산업사, 2008.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19세기」, 신구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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