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모유 수유는 과연 권장되고 있는가, 아니면 강요되고 있는가.
-모유 수유에 대한 토론 정리
1. 모유 수유를 권장하는 캠페인
2. 모유수유가 어려운 현실
3. 모유 수유의 문제에서 에코페미니즘의 문제로(모성=자연친화?)
4. 에코 페미니즘?
결 론
<참고 문헌>
모유 수유는 과연 권장되고 있는가, 아니면 강요되고 있는가.
-모유 수유에 대한 토론 정리
1. 모유 수유를 권장하는 캠페인
2. 모유수유가 어려운 현실
3. 모유 수유의 문제에서 에코페미니즘의 문제로(모성=자연친화?)
4. 에코 페미니즘?
결 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의 성역할 규정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지위의 저하로 확대될 소지도 있다.
이 자연이란 것은 현대 사회에서 인식되기에 소중하고 지켜야 할 존재로 주창되고 있으며 모두가 환경보호를 하고자 한다. 또한 에코 페미니즘은 근대 과학의 남성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위험성은 에코 페미니즘이 얇게 덮어씌운 중도적인 결론을 살짝 드러냈을 때 그 모순이 발견된다. 꿈꾸는 지렁이(꿈지모,2003)에서는 “모유 수유와 관련하여 찬성은 하고 있으나 가부장제 맥락 안에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은 모유 수유로 같다. 자각의 의미와 환경 보호적 맥락 외에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진정한 여성문제 인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분법적 사고 자연=여성, 문화=남성이란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자연에서 본다면 문화는 인간성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목적에 맞게 고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통해 얻어지는 인간의식의 산물이며 따라서 문화는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 인식론으로 풀어가야 하는가? 지금까지 같은 길들을 걸어왔던 우리의 토론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코 페미니즘은 여성이나 남성 모두에게 위험한 가부장제의 담론을 포장만 바꿔 품고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안 생리대가 일반화될 경우 일회용 생리대를 쓰는 여성들이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릴 소지는 간과하면 안 된다. 모유 수유 캠페인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분유를 먹이는 엄마의 심정이 어떠할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여성에게 유독 요구되는 윤리적 결벽성과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결 론
모유를 먹은 아이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발달을 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모유의 우월성은 수없이 입증되어온 것은 주지한 바와 같다. 결론에 대해 우리는 항상 가설을 내어놓고 실험 결과를 맞춰온 과학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모유가 분유나 우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좋은 모유에 여성들 대부분은 공감을 한다는 것이다. 자식에게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해 주고 싶어하는 엄마들의 심리를 “지능과 건강”의 보증 수표처럼 모유수유 운동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직장을 다녀야 하는, 혹은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여성들의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분유를 먹이고자 하며, 분유 광고가 왜 ‘모유에 가까운’것임을 강조하는지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독일보다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몸매에 더 신경을 써서 라거나 그 규정된 정체가 의심스러운 모성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국민 중 다수가 모유를 수유할 수 있다는 것은 ‘잘 되어 있는 복지정책’의 입증일 뿐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예 등은 모유 수유를 다수의 여성이 할 수 있을 만큼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코 모유 수유를 다수의 여성이 한다고 그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모유 수유가 아닌 여성의 입장에서 확립되어야 할 여성 복지에 있다. 유방암이라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위협에 대한 대처 보다 더 절실한 것은, 모유 수유를 해도 육아를 엄마가 전담하는 것처럼 인식되지 않을 사회적 개념 형성과 필히 수반되어야 할 진정으로 산모와 아기를 고려한 복지이다.
한편으로 복지의 문제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유 수유를 위해 복지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는 사설이 한겨레에 발표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더 본질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은 그에 대한 반론 제기에서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유 수유를 위한 복지시설이 설령 매우 잘 갖추어 진다면, 우리나라의 정신세계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은 여성에게 육아를 전담시키는 방향으로 규정지어질 것이라는, 또 다른 억압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약자를 위한 학문이었던 여성학이 그러한 방향으로만 발전할 경우,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또 다른 억압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아직은 에코 페미니즘과 여성복지를 논하는 데 있어서 외국의 사례와 이론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에코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의 심각한 환경 문제에 훌륭한 대안일지는 모르나 여성 운동의 대안이 되기에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차별의 문제로 재탄생될 소지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모유에 관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유는 우수하다. 그러나 모유수유가 어려운 여건이 문제다. 그러니까 복지와 환경을 강화하자? 아니다. 사실상 환경을 갖춘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이 양육은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말이다. 우리의 결론은 모유 수유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모유 수유를 원하고 할 수 있는 여성을 위해서 환경은 구비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유 수유를 원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폄하를 수반해서는 안 된다. 비모유 수유 여성 역시 존중되어야 함은 마찬가지 이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한 정보의 공시와 환경의 구비는 필요하다. 그러한 적절한 뒷받침도 없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비균형적인 정보와 환경의 미비의 현실 속에서 어째서 개인의 선택만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것인가.
모유 수유는 개인의 여건에 따라, 즉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선택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강요는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훌륭히 포장되곤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늘 경계해야할 것이다. 진정한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개개인마다 다르게 느낀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고 문헌>
각종 언론 매체
중앙일보, 한겨레 신문, 한국일보, 연합신문, 조선일보, 문화일보, 헤럴드 경제
KBS, MBC, SBS
<페미니즘과 과학> (샌드라 하딩, 이화여대출판부,2002)
<깨어나는 여신> (김재희, 정신세계사,2000)
<꿈꾸는 지렁이들>(꿈지모, 환경과 생명, 2003)
이 자연이란 것은 현대 사회에서 인식되기에 소중하고 지켜야 할 존재로 주창되고 있으며 모두가 환경보호를 하고자 한다. 또한 에코 페미니즘은 근대 과학의 남성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위험성은 에코 페미니즘이 얇게 덮어씌운 중도적인 결론을 살짝 드러냈을 때 그 모순이 발견된다. 꿈꾸는 지렁이(꿈지모,2003)에서는 “모유 수유와 관련하여 찬성은 하고 있으나 가부장제 맥락 안에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은 모유 수유로 같다. 자각의 의미와 환경 보호적 맥락 외에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진정한 여성문제 인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분법적 사고 자연=여성, 문화=남성이란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자연에서 본다면 문화는 인간성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목적에 맞게 고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통해 얻어지는 인간의식의 산물이며 따라서 문화는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 인식론으로 풀어가야 하는가? 지금까지 같은 길들을 걸어왔던 우리의 토론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코 페미니즘은 여성이나 남성 모두에게 위험한 가부장제의 담론을 포장만 바꿔 품고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안 생리대가 일반화될 경우 일회용 생리대를 쓰는 여성들이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릴 소지는 간과하면 안 된다. 모유 수유 캠페인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분유를 먹이는 엄마의 심정이 어떠할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여성에게 유독 요구되는 윤리적 결벽성과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결 론
모유를 먹은 아이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발달을 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모유의 우월성은 수없이 입증되어온 것은 주지한 바와 같다. 결론에 대해 우리는 항상 가설을 내어놓고 실험 결과를 맞춰온 과학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모유가 분유나 우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좋은 모유에 여성들 대부분은 공감을 한다는 것이다. 자식에게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해 주고 싶어하는 엄마들의 심리를 “지능과 건강”의 보증 수표처럼 모유수유 운동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직장을 다녀야 하는, 혹은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여성들의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분유를 먹이고자 하며, 분유 광고가 왜 ‘모유에 가까운’것임을 강조하는지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독일보다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몸매에 더 신경을 써서 라거나 그 규정된 정체가 의심스러운 모성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국민 중 다수가 모유를 수유할 수 있다는 것은 ‘잘 되어 있는 복지정책’의 입증일 뿐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예 등은 모유 수유를 다수의 여성이 할 수 있을 만큼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코 모유 수유를 다수의 여성이 한다고 그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모유 수유가 아닌 여성의 입장에서 확립되어야 할 여성 복지에 있다. 유방암이라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위협에 대한 대처 보다 더 절실한 것은, 모유 수유를 해도 육아를 엄마가 전담하는 것처럼 인식되지 않을 사회적 개념 형성과 필히 수반되어야 할 진정으로 산모와 아기를 고려한 복지이다.
한편으로 복지의 문제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유 수유를 위해 복지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는 사설이 한겨레에 발표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더 본질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은 그에 대한 반론 제기에서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유 수유를 위한 복지시설이 설령 매우 잘 갖추어 진다면, 우리나라의 정신세계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은 여성에게 육아를 전담시키는 방향으로 규정지어질 것이라는, 또 다른 억압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약자를 위한 학문이었던 여성학이 그러한 방향으로만 발전할 경우,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또 다른 억압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아직은 에코 페미니즘과 여성복지를 논하는 데 있어서 외국의 사례와 이론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에코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의 심각한 환경 문제에 훌륭한 대안일지는 모르나 여성 운동의 대안이 되기에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차별의 문제로 재탄생될 소지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모유에 관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유는 우수하다. 그러나 모유수유가 어려운 여건이 문제다. 그러니까 복지와 환경을 강화하자? 아니다. 사실상 환경을 갖춘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이 양육은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말이다. 우리의 결론은 모유 수유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모유 수유를 원하고 할 수 있는 여성을 위해서 환경은 구비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유 수유를 원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폄하를 수반해서는 안 된다. 비모유 수유 여성 역시 존중되어야 함은 마찬가지 이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한 정보의 공시와 환경의 구비는 필요하다. 그러한 적절한 뒷받침도 없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비균형적인 정보와 환경의 미비의 현실 속에서 어째서 개인의 선택만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것인가.
모유 수유는 개인의 여건에 따라, 즉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선택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강요는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훌륭히 포장되곤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늘 경계해야할 것이다. 진정한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개개인마다 다르게 느낀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고 문헌>
각종 언론 매체
중앙일보, 한겨레 신문, 한국일보, 연합신문, 조선일보, 문화일보, 헤럴드 경제
KBS, MBC, SBS
<페미니즘과 과학> (샌드라 하딩, 이화여대출판부,2002)
<깨어나는 여신> (김재희, 정신세계사,2000)
<꿈꾸는 지렁이들>(꿈지모, 환경과 생명,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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