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대중음악의 탄생
Ⅱ.영화
①누가 언제 처음 영화를 발명했을까?
②처음 영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③식민지 시대 극장의 풍경
④「아리랑」과 「임자없는 나룻배」는 왜 명화인가?
-> 시험 예상문제
Ⅲ.극장과 사람들 - 영화 포스터(식민지~해방)
Ⅱ.영화
①누가 언제 처음 영화를 발명했을까?
②처음 영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③식민지 시대 극장의 풍경
④「아리랑」과 「임자없는 나룻배」는 왜 명화인가?
-> 시험 예상문제
Ⅲ.극장과 사람들 - 영화 포스터(식민지~해방)
본문내용
국영화에 혁명적인 전기를 가져온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점이다. 그리고 한국영화에 본격적인 작가, 감독, 배우의 위치를 인식 시켜준 점등 들 수 있다.
이어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에도 발성영화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년에 발표된 <춘향전>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되는 발성영화는 자본과 경험에 미숙하고 영세한 당시 영화계에 있어서 큰 부담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제작편수와 내용적인 변에 있어서 오히려 위축되는 결과가 되었다.
- 임자없는 나룻배 -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이규환(李圭煥)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임자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에서 서정적이며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에는 좌익사상의 경향파(傾向派)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35년 이필우(李弼雨)의 기술에 의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영화는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1932년 9월에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제하에서 농토를 잃고 서울로 온 춘삼(나운규 분)과 그의 아내(김연실 분)가 어렵게 살아가던 중, 아내가 난산으로 갑자기 입원하게 된다.
수술비가 필요하게 된 춘삼은 도둑질을 하게 되고, 붙잡혀서 감옥에 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출옥한 춘삼은 아내가 이미 어떤 운전수와 결혼하였음을 알게 된다. 춘삼은 딸(문예봉 분)을 데리고 시골로 다시 내려가 시골의 강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일한다.
딸은 어느새 처녀로 숙성하고,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평화로운 부녀의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도 새로운 파란이 닥쳐온다. 그 강나루에 철교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강 하구에 교각이 세워지고 교량이 날로 뻗어나간다. 더욱이 철교공사장의 젊은 기사(임운학 분)는 딸을 유혹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날, 기사가 딸을 강제로 강간하려는 것을 목격한 춘삼은 도끼로 그를 찍어 죽인다. 그리고 철교로 뛰어올라가 침목과 철도를 때려부순다. 이때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춘삼은 죽게 되고, 딸은 기사와 싸울 때 넘어진 등잔불로 인해 불붙은 집에서 타죽게 된다. 강나루 언덕 아래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만이 출렁거리고 있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의 작품 도입부는 당시 핍박받던 농촌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으나, 나루터의 뱃사공이 철도 부설과 철교 건설에 대립하다 패배하고 죽어가는 숙명적인 설정은 일제의 침략과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가는 우리 민족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동아일보』의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하여 준 영화”, 『매일신보』의 “나운규의 노정(露呈)된 직선적인 사상적 추구와는 달리 극히 내향적이고 리리컬한 터치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당시의 평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향토색과 저항정신, 시적인 분위기 등이 잘 어우러진 우리 영화사의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Ⅲ.영화 포스터(식민지~해방)
<개척자>
1925.07.02
<들쥐>
1927.04.14
<미몽>
1936.10.25
<총후의 조선>
1937
<동경-북경(조선과 만주를 거쳐)> 1938
<망루의 결사대>
1943.04.29
<젊은 모습(若き姿)>
1943.12.01
<사랑과 맹서(愛と誓ひ)>
1945.05.24
<자유만세>
1946.10.21
이어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에도 발성영화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년에 발표된 <춘향전>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되는 발성영화는 자본과 경험에 미숙하고 영세한 당시 영화계에 있어서 큰 부담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제작편수와 내용적인 변에 있어서 오히려 위축되는 결과가 되었다.
- 임자없는 나룻배 -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이규환(李圭煥)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임자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에서 서정적이며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에는 좌익사상의 경향파(傾向派)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35년 이필우(李弼雨)의 기술에 의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영화는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1932년 9월에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제하에서 농토를 잃고 서울로 온 춘삼(나운규 분)과 그의 아내(김연실 분)가 어렵게 살아가던 중, 아내가 난산으로 갑자기 입원하게 된다.
수술비가 필요하게 된 춘삼은 도둑질을 하게 되고, 붙잡혀서 감옥에 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출옥한 춘삼은 아내가 이미 어떤 운전수와 결혼하였음을 알게 된다. 춘삼은 딸(문예봉 분)을 데리고 시골로 다시 내려가 시골의 강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일한다.
딸은 어느새 처녀로 숙성하고,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평화로운 부녀의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도 새로운 파란이 닥쳐온다. 그 강나루에 철교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강 하구에 교각이 세워지고 교량이 날로 뻗어나간다. 더욱이 철교공사장의 젊은 기사(임운학 분)는 딸을 유혹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날, 기사가 딸을 강제로 강간하려는 것을 목격한 춘삼은 도끼로 그를 찍어 죽인다. 그리고 철교로 뛰어올라가 침목과 철도를 때려부순다. 이때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춘삼은 죽게 되고, 딸은 기사와 싸울 때 넘어진 등잔불로 인해 불붙은 집에서 타죽게 된다. 강나루 언덕 아래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만이 출렁거리고 있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의 작품 도입부는 당시 핍박받던 농촌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으나, 나루터의 뱃사공이 철도 부설과 철교 건설에 대립하다 패배하고 죽어가는 숙명적인 설정은 일제의 침략과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가는 우리 민족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동아일보』의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하여 준 영화”, 『매일신보』의 “나운규의 노정(露呈)된 직선적인 사상적 추구와는 달리 극히 내향적이고 리리컬한 터치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당시의 평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향토색과 저항정신, 시적인 분위기 등이 잘 어우러진 우리 영화사의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Ⅲ.영화 포스터(식민지~해방)
<개척자>
1925.07.02
<들쥐>
1927.04.14
<미몽>
1936.10.25
<총후의 조선>
1937
<동경-북경(조선과 만주를 거쳐)> 1938
<망루의 결사대>
1943.04.29
<젊은 모습(若き姿)>
1943.12.01
<사랑과 맹서(愛と誓ひ)>
1945.05.24
<자유만세>
194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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