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모두를 부정하며 인간의 굴레인 원죄의 틀 자체를 파괴하기도 한다. Ibid., p.174.
클라이스트 인물들에게 법과 정의는 지배자의 이익만을 대변해주며, 사회적인 모순들을 그럴듯하게 위장해주는 변질된 이성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법에 대한 그들의 위반행위는 급진적으로 전개되며, 그 결과 그들은 국가제도에 의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처벌의 심급을 통하여 보복을 당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볼 때, 이기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은 필연적으로 강요와 폭력을 수반하게 되고 지배층의 전횡과 사욕만을 대변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의 안정성은 사라지고 정의의 개념은 차별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개인이나 사회집단에 대한 공격 행위를 합법화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Ibid., p.180.
법의 정당성과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이 바로 〈미하엘 콜하스〉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긴 저작기간을 거쳐 쓰여진 이 작품은 16세기 중반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재창출해 내고 있다. 한 예로 법철학자 예링 Rudolf von Ihering (1818-92)은 자신의 저서에서 미하엘 콜하스를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과 대비시키면서, 그를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다.
여기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연권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에서 민사 소송 시 개인이 무력으로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자구권이 인정되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의 권리가 국가라는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지, 양자의 상충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진일상, Op.cit., p.233.
클라이스트는 이 작품에서 말장수 한스 콜하제가 루터를 만났다는 역사적인 사실의 틀을 빌어,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 콜하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무력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내게 법의 보호가 거부된 것을 나는 추방이라고 말하겠소! 왜냐하면 평화로운 생업의 성공을 위해 나는 이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오. 그렇소, 바로 그것이 나와 내가 모은 무리들을 이 사회로 도망치도록 했소. 내게 그 보호를 거절한 자는 나를 황량한 황야로 추방한 것이고, 당신네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 자가 나에게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몽둥이를 손에 쥐어준 것이오. 배중환 역,《미하엘 콜하스 외》, 서울 : 서문당, 1999, pp.71-72.
이 때, 국가로부터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을 인간사회로부터의 추방으로 이해하는 콜하스의 입장은 루소의 자연권에 대한 견해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클라이스트의 생전에 피히테와 아담 뮐러 등에 의해 인간사회(Gesellschaft)와 국가(State)를 구분하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국가의 법질서와 콜하스의 권리가 회복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콜하스는 기꺼이 자신의 무력사용에 대한 처벌을 수용한다. 죽기 전에 콜하스는 유서를 통해 이웃인 관리를 자신의 아들들의 후견인으로 정하고 세상과의 화해 속에서 만인들의 애도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형수의 아들들은 제후에 의해 기사로 임명을 받고 기병대 교육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제국의 평화를 깨뜨린 죄인의 아들들은 신분사회의 질서로 귀속될 수 있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신분상승과 함께 제후의 측근에 머무르는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진일상, Op.cit., pp.234-235.
Ⅲ. 맺음말
클라이스트의 소설들은 모두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주인공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투쟁 자체라기보다는 투쟁의 결말이 파멸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나아가는 행동력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자신의 말 두 마리만 포기했으면 아무 문제없이 행복할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말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 아내도 잃고 그 자신이 도시를 약탈하는 폭도가 되고 만다. 그는 적당한 선에게 일을 마무리 지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하엘 콜하스는 그가 얻게 될 정의가 필연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원하는데도 왜 이렇게 저돌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미하엘 콜하스는 단순히 트롱카 융커의 횡포와 두 마리의 말 때문에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불의를 용인하는 법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윤리는 이미 개별적인 선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의 것이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에게 윤리는 외적인 제도나 법에 있지 않았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의 윤리는 지극히 칸트적이다. 정언명령에 대해 충실한 주인공들은 자신의 내적 윤리와 모순되는 그 어떤 외적 제도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순적인 상황에서 강렬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어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도 없다. 그들의 의지는 단호하고 그로인한 결과는 결코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법을 파괴하고, 끝내 그것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정의를 위해선 세계 전체와도 대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 정의가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흔히 지적되는 클라이스트 소설에 있어 사건의 ‘우연성’은 주인공들의 진리에 대한 ‘필연성’으로 순식간에 뒤집혀 ‘절대 정의’로 나아간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런 한점 빈틈없는 강렬함으로 내적 윤리를 완성하는데 있다.
〈 참고 문헌 〉
강운중, Heinrich von kleist의 깨어진 항아리 연구, 부산 : 釜山大學校, 1985.
배중환 역,《깨어진 항아리》, 부산 : 세종출판사, 1993.
《미하엘 콜하스 외》, 서울 : 서문당, 1999.
안성기 역, 클라시커 50 연극, 서울 : 해냄출판사, 2003.
조정래, 클라이스트와 복수의 스펙트럼, 헤세연구 제4집.
진일상,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문학과 사회규범”, 독일어 문학 제12집, 1999.
홍순희, 클라이스트 문학에서의 탈차별화와 비극의 물음,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4호, 2000.
클라이스트 인물들에게 법과 정의는 지배자의 이익만을 대변해주며, 사회적인 모순들을 그럴듯하게 위장해주는 변질된 이성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법에 대한 그들의 위반행위는 급진적으로 전개되며, 그 결과 그들은 국가제도에 의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처벌의 심급을 통하여 보복을 당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볼 때, 이기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은 필연적으로 강요와 폭력을 수반하게 되고 지배층의 전횡과 사욕만을 대변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의 안정성은 사라지고 정의의 개념은 차별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개인이나 사회집단에 대한 공격 행위를 합법화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Ibid., p.180.
법의 정당성과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이 바로 〈미하엘 콜하스〉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긴 저작기간을 거쳐 쓰여진 이 작품은 16세기 중반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재창출해 내고 있다. 한 예로 법철학자 예링 Rudolf von Ihering (1818-92)은 자신의 저서에서 미하엘 콜하스를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과 대비시키면서, 그를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다.
여기서는 개인의 권리와 자연권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에서 민사 소송 시 개인이 무력으로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자구권이 인정되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의 권리가 국가라는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지, 양자의 상충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진일상, Op.cit., p.233.
클라이스트는 이 작품에서 말장수 한스 콜하제가 루터를 만났다는 역사적인 사실의 틀을 빌어,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 콜하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무력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내게 법의 보호가 거부된 것을 나는 추방이라고 말하겠소! 왜냐하면 평화로운 생업의 성공을 위해 나는 이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오. 그렇소, 바로 그것이 나와 내가 모은 무리들을 이 사회로 도망치도록 했소. 내게 그 보호를 거절한 자는 나를 황량한 황야로 추방한 것이고, 당신네들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 자가 나에게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몽둥이를 손에 쥐어준 것이오. 배중환 역,《미하엘 콜하스 외》, 서울 : 서문당, 1999, pp.71-72.
이 때, 국가로부터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을 인간사회로부터의 추방으로 이해하는 콜하스의 입장은 루소의 자연권에 대한 견해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클라이스트의 생전에 피히테와 아담 뮐러 등에 의해 인간사회(Gesellschaft)와 국가(State)를 구분하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국가의 법질서와 콜하스의 권리가 회복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콜하스는 기꺼이 자신의 무력사용에 대한 처벌을 수용한다. 죽기 전에 콜하스는 유서를 통해 이웃인 관리를 자신의 아들들의 후견인으로 정하고 세상과의 화해 속에서 만인들의 애도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형수의 아들들은 제후에 의해 기사로 임명을 받고 기병대 교육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제국의 평화를 깨뜨린 죄인의 아들들은 신분사회의 질서로 귀속될 수 있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신분상승과 함께 제후의 측근에 머무르는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진일상, Op.cit., pp.234-235.
Ⅲ. 맺음말
클라이스트의 소설들은 모두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주인공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투쟁 자체라기보다는 투쟁의 결말이 파멸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나아가는 행동력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자신의 말 두 마리만 포기했으면 아무 문제없이 행복할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말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결과로 아내도 잃고 그 자신이 도시를 약탈하는 폭도가 되고 만다. 그는 적당한 선에게 일을 마무리 지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하엘 콜하스는 그가 얻게 될 정의가 필연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원하는데도 왜 이렇게 저돌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미하엘 콜하스는 단순히 트롱카 융커의 횡포와 두 마리의 말 때문에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불의를 용인하는 법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윤리는 이미 개별적인 선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의 것이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에게 윤리는 외적인 제도나 법에 있지 않았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의 윤리는 지극히 칸트적이다. 정언명령에 대해 충실한 주인공들은 자신의 내적 윤리와 모순되는 그 어떤 외적 제도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순적인 상황에서 강렬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어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도 없다. 그들의 의지는 단호하고 그로인한 결과는 결코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법을 파괴하고, 끝내 그것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정의를 위해선 세계 전체와도 대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 정의가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흔히 지적되는 클라이스트 소설에 있어 사건의 ‘우연성’은 주인공들의 진리에 대한 ‘필연성’으로 순식간에 뒤집혀 ‘절대 정의’로 나아간다. 클라이스트적 인간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런 한점 빈틈없는 강렬함으로 내적 윤리를 완성하는데 있다.
〈 참고 문헌 〉
강운중, Heinrich von kleist의 깨어진 항아리 연구, 부산 : 釜山大學校, 1985.
배중환 역,《깨어진 항아리》, 부산 : 세종출판사, 1993.
《미하엘 콜하스 외》, 서울 : 서문당, 1999.
안성기 역, 클라시커 50 연극, 서울 : 해냄출판사, 2003.
조정래, 클라이스트와 복수의 스펙트럼, 헤세연구 제4집.
진일상,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문학과 사회규범”, 독일어 문학 제12집, 1999.
홍순희, 클라이스트 문학에서의 탈차별화와 비극의 물음,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4호, 2000.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