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유종원 산문
1. 들어가며
2. 유종원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2) 정치사상
3. 유종원 산문과 그 특징
(1) 유기문학 <영주팔기>
(2) 우언 고사
4. 始得西山宴遊記
(1) 저작 배경
(2) 원문 해석
(3) 작품상의 특징
(4) 감상
5. 유종원의 문학사상
(1) 유종원과 한유의 비교
(2)유종원의 문학사상-寫實主義
1. 들어가며
2. 유종원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2) 정치사상
3. 유종원 산문과 그 특징
(1) 유기문학 <영주팔기>
(2) 우언 고사
4. 始得西山宴遊記
(1) 저작 배경
(2) 원문 해석
(3) 작품상의 특징
(4) 감상
5. 유종원의 문학사상
(1) 유종원과 한유의 비교
(2)유종원의 문학사상-寫實主義
본문내용
산색(山色)과 물소리가 모두 생활에 숨쉬는 것처럼 묘사되어 작자의 독특한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유종원은 대상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우주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를 추구하였다.
“우주의 기운과 하나 되니 아득히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조물주와 함께 노니니 그 광활한 끝을 알 수 없다. ■■■■■ 정신은 또렷한데 육체는 풀어져 만물의 변화와 하나가 된다. 그러자 내가 이전에 노닐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정한 유람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와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인 유람이 진정한 유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유종원 자신은 궁벽진 영주 땅을 넘어 전 중국의 산하를 마음껏 유람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몸은 죄를 짓고 멀리 유배를 와서 매일 공포에 떨고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높은 산에 오르고 깊은 숲에 들어가면 마음껏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인식이 시각적 범주를 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 세계로 무한히 확장되었다.
1.1.1.1.1.1.3.
5. 유종원의 문학사상
(1) 유종원과 한유의 비교
유종원은 생애의 후반기에 오직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괴롭고 참담한 언어로 구성된 그의 작품이 세간에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베껴 가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의 집 앞에는 문인 학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멀리 있는 청년들도 천 리를 머다 않고 그에게 와 스승으로 받들었다. 당시 한유가 경성에서 고문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유종원은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그를 긴밀히 도우면서 남과 북에서 서로 호응을 이루었기 때문에 고문운동은 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고문운동에 있어서 한유와 유종원은 늘 함께 거론된다. 유종원은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고 있으며, 문학적인 견해 역시 한유와 비슷했다. 그러나 한유의 도는 유가의 윤리적 관점에 입각한 교화의 도인 데 비하여, 유종원의 도는 불교와 도교 및 문예 기교의 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楊評事文集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장의 쓰임은 사령, 칭찬함과 평론, 계도와 풍자에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 말이 비루해도 족히 쓰임에 예비된다. 그러나 문체가 없다면 본시 사회 사람들의 귀를 감동시킬 수가 없으며, 후학들에게 뽐내 보여도 생각을 표현할 말이 썩어 버릴 것이므로 군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문장은 문체가 뛰어나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문학의 효용도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한유나 유종원 모두가 문장을 도를 전달하는 도구로 파악하고는 있지만 한유는 문장의 내면적인 것에 치중한 반면 유종원은 보다 외면적인 문장의 기교와 형식에도 크게 주의하고 있다. <報崔秀才>에서는 다음과 같이 도와 문사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의 말은 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학자들은 도를 추구하기에만 힘쓰고 그 문사는 소홀히 하고 있다. 문사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반드시 서(書)로 말미암는 것으로 도는 문사를 빌려서 밝혀지며, 문사는 서를 빌려 전해지는 것이다.
사실상 영향력 면에서 보면 한유가 유종원보다 좀 더 많은 힘을 작용하였다. 한유가 아무리 폄직을 당했다 해도 유종원처럼 반생을 궁벽한 곳에서 보내지는 않았으며 정치 문화의 중심권에 계속 머무르면서 후기에는 운동을 주도하기 용이한 높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의 성과 면에서 보면, 작품의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모두 한유보다는 유종원이 훨씬 괄목할 만한 작품을 내었다. 유배지로 쫓겨난 유종원은 세상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으며 그의 시문에 나타나고 있는 심오한 의미와 담담한 언어, 그리고 깊은 고뇌에 차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은 한유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2)유종원의 문학사상-寫實主義
유종원은 오랜 유배생활에서도 그의 처음 뜻을 굽히거나 관직을 얻기 위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적한 유배생활에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작품 활동을 통해 유배 생활 이전부터 갖고 있던 자신의 혁신사상을 한층 더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불우함을 산수(山水)와 자연(自然)에 의지하여 수많은 산수기(山水記)를 지어 현재까지 뛰어난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姆潭西小丘記(고모담서소구기)〉에서는 姆潭西小丘의 아름다운 산수가 이 황벽(荒僻)한 영주(永州)에 버려져 있는 것이 흡사 작자자신이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영주에 유배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연결시켰다.
유종원은 많은 우언(寓言)과 전기문(傳記文)을 남겼다. 모두 형태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주의와 풍자주의(諷刺主義)의 표현으로 환관을 욕하기도 하고 지방귀족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폭로하기도 한다.
유종원은 우언(寓言)에서 하찮은 짐승이나 벌레 같은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환관과 귀족들 전부가 인간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능이 벌레나 짐승과 같은 미물의 지능과 같다고 비유하기 위해서이다.
유종원은 우언뿐만 아니라 전기(傳記)형식을 통해 사회 비리 등의 주제를 표현하였다. 유종원의 전기문은 공훈이나 덕망을 찬양하기 위해서 쓰였던 기존의 전기와는 다르다. 기존의 전기는 역사상의 중요인물이나 영웅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종원의 전기문은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주인공들도 가장 하층에서 수탈당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포사자설(捕蛇者說)〉의 장씨(蔣氏), <종수곽탁타전(種樹郭傳)>의 곽탁타, <하간전(河間傳)>의 하간, 등은 모두 당(唐) 제국의 밑바닥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하층 인물들이다. 유종원의 전기문은 현실을 폭로 비판하는 각도에서 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장 미천한 인물, 시대적으로 대표될 수 있는 사건들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사건의 전형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복잡하고 풍부한 역사적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유종원은 대상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우주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를 추구하였다.
“우주의 기운과 하나 되니 아득히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조물주와 함께 노니니 그 광활한 끝을 알 수 없다. ■■■■■ 정신은 또렷한데 육체는 풀어져 만물의 변화와 하나가 된다. 그러자 내가 이전에 노닐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정한 유람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와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인 유람이 진정한 유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유종원 자신은 궁벽진 영주 땅을 넘어 전 중국의 산하를 마음껏 유람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몸은 죄를 짓고 멀리 유배를 와서 매일 공포에 떨고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높은 산에 오르고 깊은 숲에 들어가면 마음껏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인식이 시각적 범주를 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 세계로 무한히 확장되었다.
1.1.1.1.1.1.3.
5. 유종원의 문학사상
(1) 유종원과 한유의 비교
유종원은 생애의 후반기에 오직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괴롭고 참담한 언어로 구성된 그의 작품이 세간에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베껴 가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의 집 앞에는 문인 학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멀리 있는 청년들도 천 리를 머다 않고 그에게 와 스승으로 받들었다. 당시 한유가 경성에서 고문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유종원은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그를 긴밀히 도우면서 남과 북에서 서로 호응을 이루었기 때문에 고문운동은 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고문운동에 있어서 한유와 유종원은 늘 함께 거론된다. 유종원은 ‘문이명도(文以明道)’를 주장하고 있으며, 문학적인 견해 역시 한유와 비슷했다. 그러나 한유의 도는 유가의 윤리적 관점에 입각한 교화의 도인 데 비하여, 유종원의 도는 불교와 도교 및 문예 기교의 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楊評事文集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장의 쓰임은 사령, 칭찬함과 평론, 계도와 풍자에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 말이 비루해도 족히 쓰임에 예비된다. 그러나 문체가 없다면 본시 사회 사람들의 귀를 감동시킬 수가 없으며, 후학들에게 뽐내 보여도 생각을 표현할 말이 썩어 버릴 것이므로 군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문장은 문체가 뛰어나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문학의 효용도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한유나 유종원 모두가 문장을 도를 전달하는 도구로 파악하고는 있지만 한유는 문장의 내면적인 것에 치중한 반면 유종원은 보다 외면적인 문장의 기교와 형식에도 크게 주의하고 있다. <報崔秀才>에서는 다음과 같이 도와 문사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의 말은 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학자들은 도를 추구하기에만 힘쓰고 그 문사는 소홀히 하고 있다. 문사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반드시 서(書)로 말미암는 것으로 도는 문사를 빌려서 밝혀지며, 문사는 서를 빌려 전해지는 것이다.
사실상 영향력 면에서 보면 한유가 유종원보다 좀 더 많은 힘을 작용하였다. 한유가 아무리 폄직을 당했다 해도 유종원처럼 반생을 궁벽한 곳에서 보내지는 않았으며 정치 문화의 중심권에 계속 머무르면서 후기에는 운동을 주도하기 용이한 높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의 성과 면에서 보면, 작품의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모두 한유보다는 유종원이 훨씬 괄목할 만한 작품을 내었다. 유배지로 쫓겨난 유종원은 세상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으며 그의 시문에 나타나고 있는 심오한 의미와 담담한 언어, 그리고 깊은 고뇌에 차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은 한유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2)유종원의 문학사상-寫實主義
유종원은 오랜 유배생활에서도 그의 처음 뜻을 굽히거나 관직을 얻기 위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적한 유배생활에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작품 활동을 통해 유배 생활 이전부터 갖고 있던 자신의 혁신사상을 한층 더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불우함을 산수(山水)와 자연(自然)에 의지하여 수많은 산수기(山水記)를 지어 현재까지 뛰어난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姆潭西小丘記(고모담서소구기)〉에서는 姆潭西小丘의 아름다운 산수가 이 황벽(荒僻)한 영주(永州)에 버려져 있는 것이 흡사 작자자신이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영주에 유배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연결시켰다.
유종원은 많은 우언(寓言)과 전기문(傳記文)을 남겼다. 모두 형태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주의와 풍자주의(諷刺主義)의 표현으로 환관을 욕하기도 하고 지방귀족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폭로하기도 한다.
유종원은 우언(寓言)에서 하찮은 짐승이나 벌레 같은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환관과 귀족들 전부가 인간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능이 벌레나 짐승과 같은 미물의 지능과 같다고 비유하기 위해서이다.
유종원은 우언뿐만 아니라 전기(傳記)형식을 통해 사회 비리 등의 주제를 표현하였다. 유종원의 전기문은 공훈이나 덕망을 찬양하기 위해서 쓰였던 기존의 전기와는 다르다. 기존의 전기는 역사상의 중요인물이나 영웅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종원의 전기문은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주인공들도 가장 하층에서 수탈당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포사자설(捕蛇者說)〉의 장씨(蔣氏), <종수곽탁타전(種樹郭傳)>의 곽탁타, <하간전(河間傳)>의 하간, 등은 모두 당(唐) 제국의 밑바닥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하층 인물들이다. 유종원의 전기문은 현실을 폭로 비판하는 각도에서 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장 미천한 인물, 시대적으로 대표될 수 있는 사건들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사건의 전형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복잡하고 풍부한 역사적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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