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책 소개
2. 저자 소개
3. 저자가 활동하던 시대
4. 저자와 관련된 인물들
5. 책의 목차
6. 내용 요약
7. 참고 문헌
2. 저자 소개
3. 저자가 활동하던 시대
4. 저자와 관련된 인물들
5. 책의 목차
6. 내용 요약
7. 참고 문헌
본문내용
지혜'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다양한 행복의 정의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적어도 한 가지 혹은 많은 점에서 옳은 것이라는 유연한 태도로 무엇보다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 덕이란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행복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한’ 행위의 결과가 된다. 최고의 목적인 행복은 우리가 합목적적으로 추구한 행위의 결과이지 우연한 요소들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명예나 돈, 외모, 친구 등과 같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과 탁월성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행복의 근본적 목적인 인간의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을까? 저자는 생각한다. 무언가를 ‘가장 잘’ 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는 상태라고. 어떤 걸작을 볼 때 우리는 생각한다. ‘완벽하다! 여기서 더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겠는가!’ 그렇다. 걸작이란 그런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인간이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완벽한 품성상태를 갖춘 것을 ‘중용’이라고 명명했고, 그러한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춘 것을 ‘탁월성’이라고 표현했으며, 결국 인간이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출 때 이성을 가장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편적인 행복이란 품성상태가 아니며,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들의 하나로 놓여서는 안 된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행복한 미래를 위해 지금 공부를 한다고 하면, 공부는 그 자체로 행복한 활동이 아니다. 행복한 활동은 그것으로부터 활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추구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이다.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가 이에 속하는데 그것은 고귀하고 신실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 만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용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하며 인간의 덕도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 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공포나 자신이나 욕정이나 분노나 연민, 그리고 일반적으로 쾌락과 고통은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그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 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중용'은 '마땅함'이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마땅한 감정과 마땅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덕'을 실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에도 과도와 부족과 중간이 있다. 덕은 정의와 행동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있어 과도나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이에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 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고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예를 들어 질투나 절도, 살인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그 안에서 중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절제는 낭비라는 과도와 인색이라는 부족의 중간으로 절제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인 '덕'을 그 자체의 본성을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덕'을 지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덕은 관습의 결과로 생기는데,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면 먼저 능력을 얻고 그 후에야 실천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에 따라 행복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한 자도 인간이라 외적인 유복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적당한 정도의 외적 조건들로부터 탁월성에 따라 행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외적요건은 탁월성을 수행하기 위해 최소의 요건만 주어지면 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이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보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정 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아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목적은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기능은 바로 이성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최고의 목적이자 행복이 된다.
최고의 목적인 행복은 우리가 계속해서 목적을 위해 추구한 행위의 결과이지 우연한 요소들의 결과가 아니다. 즉, 행복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 즉 실천하는 것이 바로 최고의 목적인 행복을 향한 노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무언가를 가장 잘 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완벽한 품성상태를 가진 것이 ‘중용’이고 그러한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춘 것이 ‘탁월성’이다. 즉 인간이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출 때 이성이 가장 탁월하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8. 참고 문헌
※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광사, 아리스토텔레스 저, 최영관 옮김)
그래서 행복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한’ 행위의 결과가 된다. 최고의 목적인 행복은 우리가 합목적적으로 추구한 행위의 결과이지 우연한 요소들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명예나 돈, 외모, 친구 등과 같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과 탁월성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행복의 근본적 목적인 인간의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을까? 저자는 생각한다. 무언가를 ‘가장 잘’ 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는 상태라고. 어떤 걸작을 볼 때 우리는 생각한다. ‘완벽하다! 여기서 더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겠는가!’ 그렇다. 걸작이란 그런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인간이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완벽한 품성상태를 갖춘 것을 ‘중용’이라고 명명했고, 그러한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춘 것을 ‘탁월성’이라고 표현했으며, 결국 인간이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출 때 이성을 가장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편적인 행복이란 품성상태가 아니며,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들의 하나로 놓여서는 안 된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행복한 미래를 위해 지금 공부를 한다고 하면, 공부는 그 자체로 행복한 활동이 아니다. 행복한 활동은 그것으로부터 활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추구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이다.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가 이에 속하는데 그것은 고귀하고 신실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 만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용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하며 인간의 덕도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 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공포나 자신이나 욕정이나 분노나 연민, 그리고 일반적으로 쾌락과 고통은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그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 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중용'은 '마땅함'이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마땅한 감정과 마땅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덕'을 실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에도 과도와 부족과 중간이 있다. 덕은 정의와 행동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있어 과도나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이에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 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고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예를 들어 질투나 절도, 살인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그 안에서 중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절제는 낭비라는 과도와 인색이라는 부족의 중간으로 절제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인 '덕'을 그 자체의 본성을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덕'을 지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덕은 관습의 결과로 생기는데,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면 먼저 능력을 얻고 그 후에야 실천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에 따라 행복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한 자도 인간이라 외적인 유복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적당한 정도의 외적 조건들로부터 탁월성에 따라 행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외적요건은 탁월성을 수행하기 위해 최소의 요건만 주어지면 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이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보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정 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아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목적은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기능은 바로 이성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최고의 목적이자 행복이 된다.
최고의 목적인 행복은 우리가 계속해서 목적을 위해 추구한 행위의 결과이지 우연한 요소들의 결과가 아니다. 즉, 행복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 즉 실천하는 것이 바로 최고의 목적인 행복을 향한 노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무언가를 가장 잘 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완벽한 품성상태를 가진 것이 ‘중용’이고 그러한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춘 것이 ‘탁월성’이다. 즉 인간이 중용의 품성상태를 갖출 때 이성이 가장 탁월하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8. 참고 문헌
※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광사, 아리스토텔레스 저, 최영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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