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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뒤를 쫓으며 종군기사를 썼다. 그의 친일 행위는 “오장 마쓰이 송가”에서 아주 잘 들어난다. 이 시는 1944년 총독부 기간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대표적 친일시이다. 그는 평범한 시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이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평론)><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평론)><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항공일에 (1943,일본어시)><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헌시(獻詩1943,시)><보도행(1943,수필)><무제(1944,시)><오장 마쓰이 송가(1944,시)>. 이렇게 많은 시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고 징병을 정당화하고 신성화 시키는 작품이고, 대부분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동조해야하는 당위성을 드러내고, 태평양 전쟁을 마땅히 해야만 하는 전쟁으로 미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라는 말을 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다.
또 다른 친일 문학가는 이광수가 있다. 이광수는 친일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친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매일신보≫ 1943년 11
또 다른 친일 문학가는 이광수가 있다. 이광수는 친일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친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매일신보≫ 1943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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