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Ⅰ. 서론
Ⅱ. 페트루스 다미아니
Ⅲ. 다미아니와 단테
Ⅳ. 결론
Ⅰ. 서론
Ⅱ. 페트루스 다미아니
Ⅲ. 다미아니와 단테
Ⅳ. 결론
본문내용
망을 가짐으로써 세상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자들을 위해 준비된 곳으로 일곱 째 하늘 토성천을 보여주며, 그 대표로 다미아니를 내세우고 있다.
\'카트리아라고 불리는 등줄기를 이룬다/그 아래로는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마련된 거룩한 수도원이 있다.\'(109-111행), \'거기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올리브기름에 담긴 검소한 음식만 먹으며/일 년 내내 더위와 추위를 기쁘게 견디며/오직 명상과 사색을 즐겼다/그 수도원은 한때 이 모든 하늘들을 채울/영혼들을 수확했으나, 이제는 참으로 불모지가 되었고/곧이어 몰락할 것이다.\'(113-120행)
라는 『신곡』의 묘사에서 수도원의 성격과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1700미터라는 산의 높이와 세속과 단절을 이뤄 하나님과 친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절절한 환경, 수도원에서 영위되던 은둔적이며 금욕적인 수도생활의 특징을 열거하지만, 하늘나라에서 풍부하게 했던 그 수도원이 단테 당시 이미 허망하게 되어버린 불모지가 되었고, 곧 몰락할 것이라는 말은 수도사들이 종말적인 영원한 삶에 대해 포기하고 세속의 행복에 눈이 멀어 비판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단테가 교회개혁의 이상 가운데 하나인 \'사도의 삶\'이 자신의 시대에 타락한 성직자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너희의 요즘 목자들은 어떤 식으로든/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서 부축해 주고 이끌어주고/뒤에서 옷자락을 들어 주기를 원하지\"(130-132행)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가죽 아래 두 마리의 짐승이 움직이는 듯하구나!/이를 하늘이 인내해야 한다니!\"(134-135행)라며 비난이 절정에 이르며, 하나님의 인내 때문에 그들이 살아있는 것이라며 죄악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Ⅳ. 결론
페트루스 다미아니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수도원이념과 교회개혁운동을 살펴보았다. 루터보다 몇 세기를 앞서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한 그는 흔히 교회개혁론자로 보이기도 한다. 로마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모습 등을 보이는 듯 했으나 교황청의 일원이 되어 폭력적 민중활동인 파타리아 운동을 타협을 통해 온건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교황선출칙령』의 작성에도 참여하였으며, 일반적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 아노와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는 알렉산더 2세 교황이 “교황청의 눈이요, 흔들림이 없는 지지자”라고 불렀듯이, 그에 맞는 삶을 살았다.
단테와의 유사성을 찾은 것은 「개혁가 단테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읽고 난 후 문예사조적으로 생각했던 단테를 개혁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상당수가 다미아니의 주장과 비슷하며, 다미아니를 토성천의 제일로 소개하며 극찬하는 것을 보며 흥미가 생겼다. 단테 또한 \"둘 즉 영적이고 물리적인 권한 모두는 교회의 권세 안에 있으며, 하나는 교회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교회에 의해 행사되어야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우남상땀>이라는 교황의 칙서에 반발하는 『제정론』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즉 영적인 권한은 사제에 의해, 물리적인 권한은 왕과 기사들의 손에 의해서 행사되지만 사제의 의지와 허용에 따라 행사되어 그럼으로써 하나의 검이 또 다른 검 아래 놓이며 세상의 권위가 영적 권위에 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교회를 비판한다. 단테가 보기에 그것은 교권이 제권을 장악하려는 태도로 하나의 욕심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중세 교회의 지배적인 경향에 거스르는 개혁적 태도를 보였음에도 여전히 중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철저하게 중세적인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중세 문화의 완결자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다미아니도 국가에 대한 교황권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교황청의 새로운 흐름에 반하여 전통주의자라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으나 단순한 전통의 답습으로서만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눈이고, 흔들림이 없는 지지자였다.
개혁자로서의 페트루스 다미아니, 그리고 단테를 보면서 지금의 교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된다. 성직자들의 범죄가 횡행하는 이때에, 다미아니가 주장했던 개혁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성적으로 너무 방종한 이 시대와 “목사”라는 성직을 매매하듯, 또 예수의 몸이라는 교회를 사고파는 이 시대를 어떻게 개혁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단테가 천국편에서 그렇게도 외쳤던 수도원적인 명상의 삶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여 조금 더 좋은 사회, 국가,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
\'카트리아라고 불리는 등줄기를 이룬다/그 아래로는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마련된 거룩한 수도원이 있다.\'(109-111행), \'거기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올리브기름에 담긴 검소한 음식만 먹으며/일 년 내내 더위와 추위를 기쁘게 견디며/오직 명상과 사색을 즐겼다/그 수도원은 한때 이 모든 하늘들을 채울/영혼들을 수확했으나, 이제는 참으로 불모지가 되었고/곧이어 몰락할 것이다.\'(113-120행)
라는 『신곡』의 묘사에서 수도원의 성격과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1700미터라는 산의 높이와 세속과 단절을 이뤄 하나님과 친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절절한 환경, 수도원에서 영위되던 은둔적이며 금욕적인 수도생활의 특징을 열거하지만, 하늘나라에서 풍부하게 했던 그 수도원이 단테 당시 이미 허망하게 되어버린 불모지가 되었고, 곧 몰락할 것이라는 말은 수도사들이 종말적인 영원한 삶에 대해 포기하고 세속의 행복에 눈이 멀어 비판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단테가 교회개혁의 이상 가운데 하나인 \'사도의 삶\'이 자신의 시대에 타락한 성직자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너희의 요즘 목자들은 어떤 식으로든/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서 부축해 주고 이끌어주고/뒤에서 옷자락을 들어 주기를 원하지\"(130-132행)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가죽 아래 두 마리의 짐승이 움직이는 듯하구나!/이를 하늘이 인내해야 한다니!\"(134-135행)라며 비난이 절정에 이르며, 하나님의 인내 때문에 그들이 살아있는 것이라며 죄악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Ⅳ. 결론
페트루스 다미아니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수도원이념과 교회개혁운동을 살펴보았다. 루터보다 몇 세기를 앞서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한 그는 흔히 교회개혁론자로 보이기도 한다. 로마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모습 등을 보이는 듯 했으나 교황청의 일원이 되어 폭력적 민중활동인 파타리아 운동을 타협을 통해 온건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교황선출칙령』의 작성에도 참여하였으며, 일반적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 아노와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는 알렉산더 2세 교황이 “교황청의 눈이요, 흔들림이 없는 지지자”라고 불렀듯이, 그에 맞는 삶을 살았다.
단테와의 유사성을 찾은 것은 「개혁가 단테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읽고 난 후 문예사조적으로 생각했던 단테를 개혁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상당수가 다미아니의 주장과 비슷하며, 다미아니를 토성천의 제일로 소개하며 극찬하는 것을 보며 흥미가 생겼다. 단테 또한 \"둘 즉 영적이고 물리적인 권한 모두는 교회의 권세 안에 있으며, 하나는 교회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교회에 의해 행사되어야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우남상땀>이라는 교황의 칙서에 반발하는 『제정론』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즉 영적인 권한은 사제에 의해, 물리적인 권한은 왕과 기사들의 손에 의해서 행사되지만 사제의 의지와 허용에 따라 행사되어 그럼으로써 하나의 검이 또 다른 검 아래 놓이며 세상의 권위가 영적 권위에 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교회를 비판한다. 단테가 보기에 그것은 교권이 제권을 장악하려는 태도로 하나의 욕심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중세 교회의 지배적인 경향에 거스르는 개혁적 태도를 보였음에도 여전히 중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철저하게 중세적인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중세 문화의 완결자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다미아니도 국가에 대한 교황권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교황청의 새로운 흐름에 반하여 전통주의자라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으나 단순한 전통의 답습으로서만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눈이고, 흔들림이 없는 지지자였다.
개혁자로서의 페트루스 다미아니, 그리고 단테를 보면서 지금의 교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된다. 성직자들의 범죄가 횡행하는 이때에, 다미아니가 주장했던 개혁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성적으로 너무 방종한 이 시대와 “목사”라는 성직을 매매하듯, 또 예수의 몸이라는 교회를 사고파는 이 시대를 어떻게 개혁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단테가 천국편에서 그렇게도 외쳤던 수도원적인 명상의 삶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여 조금 더 좋은 사회, 국가,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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