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보도연맹의 결성과 성격
1. 보도연맹 결성의 배경
2.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가입경로와 규모
3. 사건 발생 시기(6․25이전)와 수행주체
Ⅲ. 6․25 당시와 그 이후의 보도연맹사건 그리고 경남
1. 6․25 당시의 보도연맹사건
2. 6․25 전쟁 당시의 경남
3. 4․19혁명과 5․16쿠데타 때의 보도연맹
Ⅳ. 국가의 은폐와 방법
Ⅴ.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와 유족들의 요구
Ⅵ.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Ⅶ.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Ⅱ. 보도연맹의 결성과 성격
1. 보도연맹 결성의 배경
2.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가입경로와 규모
3. 사건 발생 시기(6․25이전)와 수행주체
Ⅲ. 6․25 당시와 그 이후의 보도연맹사건 그리고 경남
1. 6․25 당시의 보도연맹사건
2. 6․25 전쟁 당시의 경남
3. 4․19혁명과 5․16쿠데타 때의 보도연맹
Ⅳ. 국가의 은폐와 방법
Ⅴ.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와 유족들의 요구
Ⅵ.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람은 10명 정도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젊은이들이 인식의 전환까지는 아니어도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에 대한 어떤 단초를 얻었는지, 아니면 그냥 박수치고 울다가 나왔는지 궁금하다고 한다. 교수는 "이 영화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면 '대박'이 되었을까"라고 반문한 뒤, 이 영화가 "고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에게 전쟁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 버린다"고 지적했다. 625전쟁이 단지 소재로만 차용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이 표피적으로만 다뤄졌을 때, 전쟁에 대해 침묵해온 우리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교수는 625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이뤄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운동과 관련법(625전쟁휴전이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위해 피해자들과 함께 노력해왔지만 끝내 16대 국회는 이를 무시했다. 본 글의 4장 ‘국가의 은폐와 방법’ 참조
침묵해 온 역사가 길었던 만큼 그것이 감춰진 역사를 들춰내는데 두터운 벽이 되었고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말 못하는 상처가 너무 컸다. 50여 년이 지난 세월동안 자신의 피해 상황을 사회에 밝히기도 꺼리고 있다. 자식들에게는 말해도 된다고 이제는 얘기해도 잡아가지 안는다고 말을해도 피해자의 유가족 대부분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국군도 인민군도 미군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동춘-
하지만 가해자들은 사회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보도연맹의 창설자이자 전쟁 발발 직후 조병옥 내무부장 밑에서 정보수사과장을 지낸 선우종원씨의 아들은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전쟁 중 피난 수도였던 부산에서 경찰 교육훈련소장을 지낸 박병배는 대전에서 국회의원을 4번이나 지냈다. 이처럼 전쟁 후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극과 극의 상황 속에서 50여년을 보내야했다. 가해자는 명예와 부를 얻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로의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고 오히려 학살에 대해 말하는 순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소위 빨갱이로 몰렸으며 연좌제라는 틀 속에 갇혀야 했다. 깨끗이 해결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철저히 왜곡되었던 우리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을 묻어두려는 소수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고 또 다시 삐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그 실상을 밝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이상 과거의 일들을 이제서 왈가왈부하는 단순히 과거를 되풀이하자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일들을 들추는 것은 공권력이 진정으로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또한 국민에 대한 인권침해의 사례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은 바로 친일파와 극우, 권력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었던 우리의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아직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죄인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 소수의 지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이렇게 은폐되는 것은 통일을 위한 준비에서는 물론 평화로운 질서를 보장받기 위한 새로운 21세기의 구상에서도 대단히 심각한 장애요소이다. 학살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지난 시절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으며 장차 남북한이 걸어야 할 통일의 길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518 광주 묘역에 새겨진 말처럼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이젠 그들이 말하도록 하고 우리는 그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도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역사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일 수만은 없다.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역사의 한 장으로 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수십만 보도연맹 희생자들의 진상규명과 반세기를 힘들게 견뎌 온 희생자 가족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 살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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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 돌베게
김선호, 2002, 국민보도연맹사건의 과정과 성격, 경희대사학과석사학위논문
김성환, 2000, 1950년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현장, 「말」2월호
김태광, 1988, 해방 후 최대의 양민참극 보도연맹사건, 「말」12월호
대검찰청수사국, 1972,「左翼事件實錄 10」
서중석, 2001, 사실, 이렇게 본다 2 -보도연맹- 내일을 여는 역사, 겨울호
이도영, 2001, 516쿠데타와 양민학살-그들은 왜 피학살자들을 부관참시했나, 「말」5월호
이도영, 2001, 516쿠데타와 양민학살-전 해병대사령관 김두찬을 고발한다, 「말」6월호
이영일, 2001, 학살규명, 국가가 나서라, 「한겨레21」6월28일
이태이영식, 1989, 강동정치학원과 지리산 유격대, 「역사비평」가을호
이채훈, 2001, 허위의 벽을 깬 다이너마이트, 「MBC다큐멘터리-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장주섭, 2000, 여순반란 사건과 625전후의 체험기, 「월간 인물과 사상」9월호
정희상, 1989, 경남일대 수장암장사건, 「말」7월호
정희상, 1989, 7백 양민학살 거제도의 통곡, 「말」8월호
정희상, 1990,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돌베게
청주기독교방송국 보도부, 1994,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1,2,3
팽삼림, 1998, 보도연맹 유가족의 눈물로 쓴 수기, 「말」7월호
한지희, 1995, 국민보도연맹의 경성과 성격,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경남일보 1999년 12월 31일 박명환 기자
경남전대연 토론회 주제 발표 자료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시민 사회부 기자
문화일보 2004년 3월 2일 오남석,강연곤 기자
청주시 뉴스 2004년 3월 2일 노영원 기자
주간내일신문 319호
교수는 625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이뤄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운동과 관련법(625전쟁휴전이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위해 피해자들과 함께 노력해왔지만 끝내 16대 국회는 이를 무시했다. 본 글의 4장 ‘국가의 은폐와 방법’ 참조
침묵해 온 역사가 길었던 만큼 그것이 감춰진 역사를 들춰내는데 두터운 벽이 되었고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말 못하는 상처가 너무 컸다. 50여 년이 지난 세월동안 자신의 피해 상황을 사회에 밝히기도 꺼리고 있다. 자식들에게는 말해도 된다고 이제는 얘기해도 잡아가지 안는다고 말을해도 피해자의 유가족 대부분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국군도 인민군도 미군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동춘-
하지만 가해자들은 사회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보도연맹의 창설자이자 전쟁 발발 직후 조병옥 내무부장 밑에서 정보수사과장을 지낸 선우종원씨의 아들은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전쟁 중 피난 수도였던 부산에서 경찰 교육훈련소장을 지낸 박병배는 대전에서 국회의원을 4번이나 지냈다. 이처럼 전쟁 후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극과 극의 상황 속에서 50여년을 보내야했다. 가해자는 명예와 부를 얻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로의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고 오히려 학살에 대해 말하는 순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소위 빨갱이로 몰렸으며 연좌제라는 틀 속에 갇혀야 했다. 깨끗이 해결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철저히 왜곡되었던 우리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을 묻어두려는 소수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고 또 다시 삐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그 실상을 밝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이상 과거의 일들을 이제서 왈가왈부하는 단순히 과거를 되풀이하자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일들을 들추는 것은 공권력이 진정으로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또한 국민에 대한 인권침해의 사례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은 바로 친일파와 극우, 권력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었던 우리의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아직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죄인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 소수의 지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이렇게 은폐되는 것은 통일을 위한 준비에서는 물론 평화로운 질서를 보장받기 위한 새로운 21세기의 구상에서도 대단히 심각한 장애요소이다. 학살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지난 시절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으며 장차 남북한이 걸어야 할 통일의 길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518 광주 묘역에 새겨진 말처럼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이젠 그들이 말하도록 하고 우리는 그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도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역사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일 수만은 없다.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역사의 한 장으로 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수십만 보도연맹 희생자들의 진상규명과 반세기를 힘들게 견뎌 온 희생자 가족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 살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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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2000, 1950년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현장, 「말」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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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2001, 사실, 이렇게 본다 2 -보도연맹- 내일을 여는 역사, 겨울호
이도영, 2001, 516쿠데타와 양민학살-그들은 왜 피학살자들을 부관참시했나, 「말」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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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2001, 학살규명, 국가가 나서라, 「한겨레21」6월28일
이태이영식, 1989, 강동정치학원과 지리산 유격대, 「역사비평」가을호
이채훈, 2001, 허위의 벽을 깬 다이너마이트, 「MBC다큐멘터리-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장주섭, 2000, 여순반란 사건과 625전후의 체험기, 「월간 인물과 사상」9월호
정희상, 1989, 경남일대 수장암장사건, 「말」7월호
정희상, 1989, 7백 양민학살 거제도의 통곡, 「말」8월호
정희상, 1990,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돌베게
청주기독교방송국 보도부, 1994,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1,2,3
팽삼림, 1998, 보도연맹 유가족의 눈물로 쓴 수기, 「말」7월호
한지희, 1995, 국민보도연맹의 경성과 성격,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경남일보 1999년 12월 31일 박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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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04년 3월 2일 오남석,강연곤 기자
청주시 뉴스 2004년 3월 2일 노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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