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다. 그가 죽은 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1889.11.24~1930.1.24)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했다. 홍범도 (1868~1943.10.25)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군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준 (1545~16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여립 모반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 2등으로 전성군에 봉해졌다. 또한 선조, 광해군에 걸쳐 좌참찬·형조판서·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 후 광해군 때 대북의 난정으로 은퇴했고,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이상설 (1870.12.7~1917.3.2) 대한협동회 회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장지연 (1864.11.30~1920.10.2)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며 우국지사로, 만민공동회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을 써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손병희 (1861.4.8~1922.5.19)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로,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그 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1902.12.16~1920.9.28)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김구 (1876.7.11~1949.6.26)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또한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 (1900.8.10~1932.10.10) 금정청년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1889.11.24(음)~1930.1.24) 한국의 독립운동가.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했다. 등 일제 강점기의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열심히 싸웠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이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다시 주권을 탈환하게 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항복하자, 한반도에는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각각 미·소 양군이 진주, 점령정책을 펴게 되었다. 전후 냉전체제가 점차 노골화되면서 미국의 대한정책은 신탁통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한반도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유엔의 결의에 의해 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개원,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 7월 24일 취임식을 가진 데 이어 건국내각이 구성되었다. 8월 15일 해방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선포식을 개최,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 우리나라의 주권을 탈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인의 손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는 또 다른 비극을 맞이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다시 주권을 탈환하게 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항복하자, 한반도에는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각각 미·소 양군이 진주, 점령정책을 펴게 되었다. 전후 냉전체제가 점차 노골화되면서 미국의 대한정책은 신탁통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한반도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유엔의 결의에 의해 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개원,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 7월 24일 취임식을 가진 데 이어 건국내각이 구성되었다. 8월 15일 해방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선포식을 개최,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 우리나라의 주권을 탈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인의 손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는 또 다른 비극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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