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생긴 노고勞苦의 흔적인 주름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 카라바조의 유디트 원서에는 his contemporary\'s painting of Judith라고 되어있는데, 문맥상 카라바조의 작품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이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번역하기로 한다. 역주
에 대해 예술가 Anniblae Carracci가 할 수 있었던 말의 전부였다.
후에 그의 작품들의 특징이 된 미적 장치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이 작품이었다: 인위적인, 거의 지하실에서의 불빛에 의해 강조된 것과 같은, 어두운 밤의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들 말이다.
작가가 계속해서 어두움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회귀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카라바조가 난폭하고 흉악한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1606년 5월 28일, 그는 테니스 경기를 두고 한 노름판에서의 말다툼 중 어떤 Ranuccio Tomassoni라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로마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수많은 카라바조에 대한 출두명령서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이것이 결코 법과의 충돌을 야기했던 첫 사건은 아니었다. 일례로, 그는 Osteria del Moro에서 무례한 웨이터에게 아티초크가 담긴 접시를 던지기도 했다; 또 다른 예로, 그는 무기소지허가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한 경찰관을 모욕하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로마의 “불한당Bravo\"로서의 대담한 삶을 살았다. 비록 그가 제때 그림을 그려내긴 했지만, 그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의 불량배친구들과 나가거나, 테니스 게임을 몇 차례 하거나 했으며, ”언제나 결투나 말다툼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Floris Van Dyck, in: Rottgen, p.152
이러한 일에 대비하여 그가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검은 그 크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고 한다.
검과 단도, 그리고 칼은 거의 모든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와 참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의 작품에서 일종의 새디즘적인 중심테마를 구성한다. 예술가의 일상에서, 그들은 자기주장의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무기소지허가증을 보여 달라는 경찰관에 대한 모욕은 그런 의미에서 납득할만한 것이다: 검을 찬다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고, 그가 보통 입고 다녔던 더럽고 낡은 의복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귀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야심가였고, 아마도 그의 공격성은 사회적 열등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수단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신학에의 불일치, 그리고 그 결과 줄어든 공식적 작품의뢰로 인해 그의 최고의 작품들이 거절된 것에 대응하여 카라바조의 공격적 행동이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그를 로마로부터 도망치게 만든 1606년의 살해로 그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는 여생 동안 피해망상으로 고통 받았고, 장소를 옮겨가며 유랑했지만, 그의 명작들을 그 뒤에 남겨 17세기 유럽예술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던 도중 1610년 쓸쓸하게-어떤 동시대인이 “그가 살아왔던 것만큼이나 비참하게” Giovanni Baglione, cited by Hibbard, p.356
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죽었다.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화가
번역후기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도, 작가의 삶과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 참수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것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살벌한 와중에도 이와 같이 좋은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카라바조는 사실 큰 관심이 없던 작가였는데, 이번 과제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조금이나마 친밀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짧은 글로 그의 삶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이렇게 조금씩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아..이렇게 목 자르는 작품이 많구나..’하고 놀랍기도 하고 무서웠습니다. 역시 그는 ‘참수’에 매혹 당했던 것일까요. 그래도 카라바조가 원래부터 성격도 더럽고 음흉한 작자, 반사회적 성격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왠지 어딘가 심하게 상처받아서 뒤틀려버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하는 동정의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번역은 역시나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습니다. 뭐랄까, 남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랄까요. 아무튼 번역에 있어서는, 영어사용자들의 문장 길게 쓰기와 수동태사용의 벽을 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아마 앞으로 백번을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원저자가 쓴 미주를 여기서는 각주로 그대로 옮겨온 것을 밝힙니다.
Appendix
Appendix 1
ALLORI, Cristofano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1613
Oil on canvas, 120,4 x 100,3 cm
Royal Collection, Windsor
Appendix 2
CARAVAGGIO
The Sacrifice of Isaac
1603
Oil on canvas,
104 x 135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Appendix 3
CARAVAGGIO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
1608
Oil on canvas,
361 x 520 cm
Saint John Museum,
La Valletta
Appendix 4
CARAVAGGIO
David
1609-10
Oil on canvas, 125 x 101 cm
Galleria Borghese, Rome
에 대해 예술가 Anniblae Carracci가 할 수 있었던 말의 전부였다.
후에 그의 작품들의 특징이 된 미적 장치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이 작품이었다: 인위적인, 거의 지하실에서의 불빛에 의해 강조된 것과 같은, 어두운 밤의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들 말이다.
작가가 계속해서 어두움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회귀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카라바조가 난폭하고 흉악한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1606년 5월 28일, 그는 테니스 경기를 두고 한 노름판에서의 말다툼 중 어떤 Ranuccio Tomassoni라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로마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수많은 카라바조에 대한 출두명령서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이것이 결코 법과의 충돌을 야기했던 첫 사건은 아니었다. 일례로, 그는 Osteria del Moro에서 무례한 웨이터에게 아티초크가 담긴 접시를 던지기도 했다; 또 다른 예로, 그는 무기소지허가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한 경찰관을 모욕하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로마의 “불한당Bravo\"로서의 대담한 삶을 살았다. 비록 그가 제때 그림을 그려내긴 했지만, 그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의 불량배친구들과 나가거나, 테니스 게임을 몇 차례 하거나 했으며, ”언제나 결투나 말다툼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Floris Van Dyck, in: Rottgen, p.152
이러한 일에 대비하여 그가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검은 그 크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고 한다.
검과 단도, 그리고 칼은 거의 모든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와 참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의 작품에서 일종의 새디즘적인 중심테마를 구성한다. 예술가의 일상에서, 그들은 자기주장의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무기소지허가증을 보여 달라는 경찰관에 대한 모욕은 그런 의미에서 납득할만한 것이다: 검을 찬다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고, 그가 보통 입고 다녔던 더럽고 낡은 의복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귀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야심가였고, 아마도 그의 공격성은 사회적 열등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수단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신학에의 불일치, 그리고 그 결과 줄어든 공식적 작품의뢰로 인해 그의 최고의 작품들이 거절된 것에 대응하여 카라바조의 공격적 행동이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그를 로마로부터 도망치게 만든 1606년의 살해로 그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는 여생 동안 피해망상으로 고통 받았고, 장소를 옮겨가며 유랑했지만, 그의 명작들을 그 뒤에 남겨 17세기 유럽예술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던 도중 1610년 쓸쓸하게-어떤 동시대인이 “그가 살아왔던 것만큼이나 비참하게” Giovanni Baglione, cited by Hibbard, p.356
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죽었다.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화가
번역후기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도, 작가의 삶과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 참수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것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살벌한 와중에도 이와 같이 좋은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카라바조는 사실 큰 관심이 없던 작가였는데, 이번 과제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조금이나마 친밀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짧은 글로 그의 삶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이렇게 조금씩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아..이렇게 목 자르는 작품이 많구나..’하고 놀랍기도 하고 무서웠습니다. 역시 그는 ‘참수’에 매혹 당했던 것일까요. 그래도 카라바조가 원래부터 성격도 더럽고 음흉한 작자, 반사회적 성격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왠지 어딘가 심하게 상처받아서 뒤틀려버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하는 동정의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번역은 역시나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습니다. 뭐랄까, 남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랄까요. 아무튼 번역에 있어서는, 영어사용자들의 문장 길게 쓰기와 수동태사용의 벽을 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아마 앞으로 백번을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원저자가 쓴 미주를 여기서는 각주로 그대로 옮겨온 것을 밝힙니다.
Appendix
Appendix 1
ALLORI, Cristofano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1613
Oil on canvas, 120,4 x 100,3 cm
Royal Collection, Windsor
Appendix 2
CARAVAGGIO
The Sacrifice of Isaac
1603
Oil on canvas,
104 x 135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Appendix 3
CARAVAGGIO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
1608
Oil on canvas,
361 x 520 cm
Saint John Museum,
La Valletta
Appendix 4
CARAVAGGIO
David
1609-10
Oil on canvas, 125 x 101 cm
Galleria Borghese,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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