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의 지역개발(호광지방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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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청시대의 지역개발(호광지방의 사례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명․청대 이전까지의 강남개발
1)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인구이동과 강남개발
2) 안사의 난(安史─亂)과 난 이후 당송 교체기의 강남개발

2. 명․청대의 강남개발
1) 里甲制의 해체
2) 인구이동
3) 지역 개발의 형태

3. 호광지방에서의 土·客 갈등

4. 호광미의 유통과 객상의 활동
(1) 미곡의 유출
(2) 객상의 활동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에 방출할 수밖에 없었다. 명 중기 이래 최대의 곡창 지대였던 호광지방에서, 식량 부족으로 미곡 약탈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했던 사회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곡의 유출로 인한 단순한 미곡 부족 현상이 아니라, 납세를 위한 곡물 매매 과정에서의 토착 농민의 몰락이라는 더욱 심각한 사회 현상이 만연했던 곳이 바로, 역설적이게도 ‘천하를 풍족하게 만든다는’ 호광지방이었다.
Ⅲ. 결론
동진 시대를 출발점으로 시작된 강남 개발의 역사는, 남조의 제 왕조들과, 당·송 변혁기를 거쳐 전개되어왔고, 명 중기에 이르면 호광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성기에 접어든다. 이때에 등장한 ‘호광숙천하족’이라는 속언은 명·청대의 인구 이동과 그에 따른 미곡 생산 중심지의 이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호광지역 개발의 이면에는, 신사·지주층의 토지 겸병, 세역제도의 불균등성, 화폐경제의 발전과 그것의 농촌 침투 등이 야기한 사회 모순이 존재했고, 그것이 명조를 유지하는 이갑제 질서의 동요를 불러왔다. 이갑제 질서의 동요는 대규모의 인구 이동으로 이어졌고, 많은 인구 유인 요소를 가지고 있던 호광지방은 이 시기에 많은 인구의 유입으로 미곡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강한 평원과 동정 평원 등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완전이 개발되었다. 또한 사천, 호북, 섬서의 삼성 교계지역 등, 산지에도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산간수리 시설을 이용한 미곡 경작과, 외래 작물의 경작으로 많은 생산량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곡 생산량의 확대의 이면은 사회 모순으로 가득했다. 일단 지나친 완전 개발은 수해의 위험을 크게 증가시켰다. 특히 객민과 토착민이 완전을 둘러싼 경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객민에 의해 토착민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한 폭력 사태와 소송이 빈발했다. 이런 사회 문제에 대해서 원조는, 원적발환주의를 고수한다거나, 임시방편에 불과한 객민부적정책을 펼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사회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명조의 정책은 수많은 토착민의 몰락을 막지 못하였고, 이에 객민과 토착민의 인구 대류 현상까지 나타났다.
객상의 활동 역시 또 다른 문제 요소였다. ‘호광숙 천하족’이라는 속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객상의 활동에 의해 호광은 중국 전역을 먹이는 곡창지대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주변부의 수많은 상업도시의 발달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객상이 중국의 유통경제 발달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그러나 역시 그 이면에는 토착민에 대한 경제적 지배라는 사회 모순이 존재했다. 객상들은 농민들의 미곡을 수매하는 과정에서 거래 조건상의 우위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였고, 공공연하게 도량형을 속이는 일까지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고리대의 덫에 빠져 몰락한 토착민들의 인신을 장악하여 전호로 부리기까지 하는 등 객상으로 인한 폐해는 막대했다. 이런 사회 모순 가운데, 천하를 풍족케 하는 호광지방의 영세민들은 정작 곡식을 구경할 수가 없어, 객상·지주의 미곡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호광숙천하족’이라는 속언은 당시의 사회상을 매우 적절히 드러내 주는 표현이지만, 그 속언이 풍기는 풍요로움의 이미지는, 그 풍요의 이면에서 허덕이던 영세민들의 삶을 교묘히 감추고 있다. 본문에서는 명 중기 이래 가속화된 호광지역으로의 인구 이동과 거기에서 파생된 사회 모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그런 문제들은 비단 호광지역만의 문제도 아니었고, 객민에 의한 문제만도 아니었다. 이미 전국의 소농민들은 신사·지주층의 토지겸병과 그들의 세역탈면으로 인한 세역부담의 모순, 화폐경제의 농촌 침투로 인한 과도기적 폐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광지방으로의 대 인구이동은 그런 상황을 더욱 심화시킨 요인인 것이다. 당시의 인구 급증과 더불어 미곡의 시장 가격은 치솟았으나, 정작 객상에게 미곡을 판매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은 쌀 20석으로 은 1냥을 바꿀 수 있었을 뿐이다. 즉 이런 사회, 경제적 부작용은 중국 전역의 문제였던 것이다.
호광의 농업생산력 발달은 거시적으로는 중국의 농업·상업 사회를 크게 발전시킨 요인이다. 그러나 호광미가 배불린 것은 토착민의 이익 침해하며 성장한 객민과 객상, 그리고 신사·지주층이었다.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거대한 증가라는 통계 수치에 매몰되어, 천하가 풍족한 가운데에도 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의 외래 작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그것마저도 감사해야 했던 영세민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명·청대의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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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근세사회경제사연구』, 서울 :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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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웅 외 2명, 「淸代 川 湖 陝 交界地域의 경제개발과 민간풍속」, 『동양사학연구』 제 87집,
2004.
정철웅, 이준갑, 「청대 川, 湖, 陝 교계 산간지역의 경제개발과 그 성격」, 『중국사연구』
제 41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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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5.03
  • 저작시기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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