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를 뒤흔든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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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역사를 뒤흔든 여인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산을 견제하게 되었다. 양국충 이전의 재상이었던 이임보가 살아있을 때, 양국충과 안록산은 서로 공모하여 이임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임보가 먼저 죽게 되자 둘 사이에는 서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암투를 벌여가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을 장악했던 이임보가 죽자 재상에 오른 양국충은 안록산을 제거하기 위해 현종에게 계속해서 안록산이 모반할 뜻을 품고 있다고 간하였고, 양귀비는 현종과 안록산 사이에서 안록산을 변명해주며 안록산에 대해 날카로워지는 현종의 마음을 무마시키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위험을 느낀 안록산은 급기야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을 삼아 755년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세워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간신 양국충을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킨 안록산을 중심으로 한 15만 반란군은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갔고, 이들의 위세가 너무나 드세었기 때문에 현종은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마외파(馬嵬坡)에 다다르자 현종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양국충을 비롯한 양씨 일가가 난을 초래한 책임을 들어 현종에게 이들을 죽일 것을 강하게 요청하였고 상황이 급박했던 현종은 군사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승낙하게 되었다.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을 잘라 처형한 군사들은 계속해서 양귀비도 죽여야 함을 간하며 현종을 압박해 들어가게 된다. 애첩에 대한 아쉬운 미련에 괴로워하면서도 군사들의 요청을 물리칠 수 없었던 현종과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양귀비는 마침내 38세의 젊은 나이로 목을 매달아 자결하여 당나라 역사를 바꾸며 풍미했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사의 난 때 죽지 않고 일본 상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30년 후인 68세에 생을 마쳤다는 설도 있음)

안록산은 한때 화북(華北)지방의 주요지역을 점령하며 세를 떨쳤으나 애첩의 소생을 편애하는 것에 반감을 가진 둘째 아들 경서(慶緖)와 공모한 측근 이저아(李猪兒)의 배신으로 자는 도중 살해당하게 된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은 태상황(太上皇)의 지위로 오르고 자신의 아들인 숙종(肅宗)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으며,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뒤에도 죽어간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으로 종말 맺은 인연을 사랑으로 노래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이들의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 백거이는 이 시에서 다음과 같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

臨別殷勤重奇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간곡히 다시금 전할 말 부탁했는데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그 말 중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다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석날 장생전에서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 나면 비익조가 되고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도 그 끝이 있고 시간도 다함이 있으나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각 눈과 날개를 하나씩만 가지고 있어 함께 하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 속 상상의 새이고, 연리지(連理枝)는 뿌리가 서로 다른 두 나무에서 각각 생겨난 가지가 서로 얽혀 이루어진 가지를 뜻하는 것으로 그만큼 현종과 양귀비의 만남과 헤어짐을 간절한 애틋함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아이가 가르쳐준 곳을 찾아가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양귀비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환생하기 전 실제의 양귀비를 찾아 먼 시간여행을 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꽃을 ‘우미인초’라 부른다고도 한다. 초(楚)나라 항우의 부인이었던 우미인(虞美人)이 유방의 군대에 포위된 항우가 이별의 술자리에서 석별의 정을 읊으며 의기소침하자 항우의 시에 답하여 노래를 부른 뒤 자신이 짐이 될까 걱정하여 항우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나중에 우미인의 무덤에 이 꽃이 피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 우미인의 죽음으로 끝난 슬픈 사랑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양귀비꽃은 약 70여종이 있는데 아래의 것들은 마약 성분이 없는 관상용 꽃들입니다.

꽃양귀비 - 일명 우미인초, 개양귀비
서태후(西太后)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자식도 망치고 나라마저 말아먹어 버린 여인
서태후(1835~1908)는 19세기 말 남존여비사상이 엄격한 유교국가 중국을 48년간 마음대로 통치하고 간 여인이다.
그녀는 안후이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가난 속에서 보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애인을 버리면서까지 궁녀가 되어 부귀영화를 꿈꿨다. 타고난 재주와 미모로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일약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함풍제의 요절로 여섯 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 그녀의 시대를 연다.
권력에 눈이 먼 서태후는 아들의 성장을 경계,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황제가 환락에 빠져들어 병에 걸려 죽게 하고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도록 한다. 서태후는황실에 세 살, 네 살의 어린 아이를 황제로 내세워 양어머니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이어간다. 또한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김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며,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여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현재까지도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여름 궁전)을 짓게 하였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잔치 과식으로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진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 정치풍토는 청조를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서태후 사후 몇 년 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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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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