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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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화변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머리말 Ⅳ.『閑中錄』
Ⅱ.아버지와 아들 1.‘限中錄’, 또는 ‘泣血錄’
1.영조의 콤플렉스, 경종독살설 2.진실성
2.외동아들 사도세자 Ⅴ.정조의 추존
Ⅲ.壬午禍變 1.洗草
1.나경언의 고변 2.정조의 의리
2.壬午禍變 발발 Ⅵ.맺음말.
3.‘黨爭犧牲說’과‘性格葛藤說(狂症說)’ Ⅶ.참고문헌

본문내용

들의 배후에는 기호 남인으로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연결되어 있었다. 채제공이라 하면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악행이라 알려진 사건에 대해 모함이라는 상소를 올렸던 자다. 이 상소에 힘입어 혹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정조는 영조의 임오화변에 대한 후회가 담긴 ‘金書’를 제시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일이 자신의 실수라고 인정한 내용으로서 영조가 채제공에게 전한 편지였다. 이에 따라 벽파 세력은 역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영남만인소 사건으로서 정조는 유생 이우 등을 등용하여 노론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김영민, 위의 논문, p.301
영조 대와 정조대 모두 임오화변이란 사건은 단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문제 그 이상이었다. 당파는 갈려졌고 그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해 忠逆論에 휘말리면서 각각 黨의 논리를 펼쳤다. 표면은 ‘임오년의 의리’에 관한 논점이었지만 결국에는 조선 중기부터 내려온 붕당정치의 한 면모로 볼 수도 있음이었다. 오히려 ‘世子’라는 지위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적 갈등이 가려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종 대의 독살설로부터 이어져온 혹은 시대를 더 올라가 숙종 대의 西人이 분열에서부터 시작한 극심한 朋黨정치가, 결국 탕평을 이루지 못한 채 세자의 죽음이라는 禍變까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Ⅵ.맺음말
임오화변의 원인이 ‘당쟁희생설’과 ‘광증설’로 나눠진 가장 큰 이유는 『承政院日記』가 정조에 의해 세초되었다는 점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지웠지만, 장헌세자로 추존한다. 임오화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사도세자가 역모의 혐의로 처벌 받았으니, 훗날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쟁희생설’의 주요논지는 나주벽서사건 처리 과정 당시 사도세자는 적어도 노론의 편은 아니었다. 때문에 노론은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을 이용하여 영조로부터 세자의 역모 의심을 키워 나갔고, 최종적으로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함께 소론의 영수인 조재호를 제거하였다. ‘성격갈등설(광증설)’의 주요논지는 『閑中錄』뿐만 아니라 여러 실록 속에서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병에 관한 내용이다. 심지어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열은 높고 울화는 극도에 달해 마치 미칠 듯합니다. (1754년 편지)
알 수 있듯이 사도 자신도 병에 대해 지각을 한 상황이 나타난다.
앞서 말했듯이 正史의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다. 때문에 『閑中錄』에 대해 객관성을 의심하면서도 이를 증명할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하나의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사건은 없다. 성격갈등설(광증설)이 비판받는 내용 중 하나가 ‘아들이 정신병에 걸리면 병을 치료하지 왜 죽이냐’이다. 반면 당쟁희생설이 비판받는 내용 중 하나는 ‘자신이랑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하나뿐인 외아들을 죽이겠느냐’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주장과 비판을 보았을 때,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는 점들이 보인다. 먼저 ‘성격갈등설(광증설)’을 주장하더라도, 나경언의 고변 사건의 절차상 문제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당쟁희생설’을 주장하더라도, 사도가 영조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얻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왜냐하면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의 주장을 비판할 때, ‘단순 그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겠느냐’의 논리이다. 이로서 각기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이들은 이미 한가지의 이유만(광증 혹은 당쟁)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Ⅶ.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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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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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5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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