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돌궐 제2제국의 흥망
1. 돌궐 제2제국의 등장과 발전
2. 돌궐 제2제국의 멸망
Ⅲ. 위구르와 당조의 관계
1.위구르 제국의 등장
1)위구르 제국의 등장
2) 구성(九姓) 회홀의 성립
3) 안록산의 난 이전 위구르
2.안록산의 난과 대당 관계
1) 안록산의 난에 대한 군사적 원조
2) 위구르의 재개입과 당에 대한 압박
3) 대당관계 악화와 고립
3.안록산의 난 이후의 대당 관계
Ⅳ. 나가는 말
-참고문헌
Ⅱ. 돌궐 제2제국의 흥망
1. 돌궐 제2제국의 등장과 발전
2. 돌궐 제2제국의 멸망
Ⅲ. 위구르와 당조의 관계
1.위구르 제국의 등장
1)위구르 제국의 등장
2) 구성(九姓) 회홀의 성립
3) 안록산의 난 이전 위구르
2.안록산의 난과 대당 관계
1) 안록산의 난에 대한 군사적 원조
2) 위구르의 재개입과 당에 대한 압박
3) 대당관계 악화와 고립
3.안록산의 난 이후의 대당 관계
Ⅳ. 나가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리를 제시하였으며 이것은 카를륵 카간이 돌궐을 대체하는 혁명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의 전통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과 그들의 거주 지역을 지배 영역화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 이것은 카간이 텡그리로부터 수명(受命)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국가 건설의 구체적인 과정이었다. 카를륵 카간의 원정 내용은 그가 건설한 세 개의 정계비와 그의 묘지명에 잘 반영되어 있다. 원정은 747년 발생한 위구르 부족 내부의 동요 건국자인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혼란이 있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156.
와 주변의 도전을 753년 ≪타리아트 비문≫에서 전통과 백성이 마련되어 위구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 시기까지 군사적 원정의 승리를 통해 불식하고 국가를 재건해 나갔다.
2) 구성(九姓) 회홀의 성립
확보된 백성을 통치 체제 속에 편제하기 위해 카간 씨족인 야글라카르 씨족 귀구르의 지배 집단으로 돌궐이 740년대 중반에 붕괴한 직후 유목 세계의 패권을 바로 장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구르의 추장 쿠틀룩 보일라는 연합 세력인 바스밀과 카를룩을 격파하고,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라고 자칭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39.
의 통제를 받는 위구르 내부의 여러 씨족 집단을 연맹집단으로 삼고 그 추장들을 도독으로 삼았다. 이들은 핵심 집단인 카간 씨족과 함께 국가의 중추 세력을 형성해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투르크계 부족들의 연합체들 토쿠즈 오구즈와 토쿠즈 타타르 등
은 과거와 같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국가 구조의 외곽을 구성하는 종속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경쟁 관계인 카를록과 바스밀은 격파당한 뒤 그 일부가 객부락으로 종속 집단에 편입되어 군사적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조직 동원하기 위해 카간은 군사적인 기반인 친병 집단을 편성하고 아들들에게 백성을 분봉함으로써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 회홀 한문 사료에 자주 등장하는 위구르 유목 제국의 명칭인 ‘구성 회홀’ 또는 ‘구성 회골’은 초기 부족 연합체의 명칭이 확대되면서 국가의 명칭으로 고정되는 특성을 보인다. 위구르 국가의내부 구조는 야글라카르 씨족의 핵심 집단을 중심으로 문화적·혈연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연맹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 회홀이 있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 89, 91.
’이라고 불리는 유목국가가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구성회홀은 단순히 위구르만이 아니라 그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초부족적’ 개념으로 확대·재편되었다.
3) 안록산의 난 이전 위구르
카를륵 카간은 대외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당조의 인정 역시 형식적인 관계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당조는 돌궐 항호 돌궐 제1 제국의 붕괴로 발생한 돌궐의 유민을 ‘돌궐 항호’라고 일
또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카를륵 카간은 위구르의 전통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피지배 대상인 백성과 그들의 거주 지역을 지배 영역화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 이것은 카간이 텡그리로부터 수명(受命)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국가 건설의 구체적인 과정이었다. 카를륵 카간의 원정 내용은 그가 건설한 세 개의 정계비와 그의 묘지명에 잘 반영되어 있다. 원정은 747년 발생한 위구르 부족 내부의 동요 건국자인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혼란이 있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156.
와 주변의 도전을 753년 ≪타리아트 비문≫에서 전통과 백성이 마련되어 위구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 시기까지 군사적 원정의 승리를 통해 불식하고 국가를 재건해 나갔다.
2) 구성(九姓) 회홀의 성립
확보된 백성을 통치 체제 속에 편제하기 위해 카간 씨족인 야글라카르 씨족 귀구르의 지배 집단으로 돌궐이 740년대 중반에 붕괴한 직후 유목 세계의 패권을 바로 장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구르의 추장 쿠틀룩 보일라는 연합 세력인 바스밀과 카를룩을 격파하고,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라고 자칭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39.
의 통제를 받는 위구르 내부의 여러 씨족 집단을 연맹집단으로 삼고 그 추장들을 도독으로 삼았다. 이들은 핵심 집단인 카간 씨족과 함께 국가의 중추 세력을 형성해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투르크계 부족들의 연합체들 토쿠즈 오구즈와 토쿠즈 타타르 등
은 과거와 같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국가 구조의 외곽을 구성하는 종속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경쟁 관계인 카를록과 바스밀은 격파당한 뒤 그 일부가 객부락으로 종속 집단에 편입되어 군사적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조직 동원하기 위해 카간은 군사적인 기반인 친병 집단을 편성하고 아들들에게 백성을 분봉함으로써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 회홀 한문 사료에 자주 등장하는 위구르 유목 제국의 명칭인 ‘구성 회홀’ 또는 ‘구성 회골’은 초기 부족 연합체의 명칭이 확대되면서 국가의 명칭으로 고정되는 특성을 보인다. 위구르 국가의내부 구조는 야글라카르 씨족의 핵심 집단을 중심으로 문화적·혈연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연맹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 회홀이 있었다.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문학과 지성사, 2005. p. 89, 91.
’이라고 불리는 유목국가가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구성회홀은 단순히 위구르만이 아니라 그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초부족적’ 개념으로 확대·재편되었다.
3) 안록산의 난 이전 위구르
카를륵 카간은 대외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당조의 인정 역시 형식적인 관계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당조는 돌궐 항호 돌궐 제1 제국의 붕괴로 발생한 돌궐의 유민을 ‘돌궐 항호’라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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