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사 분단과정 [국제회의와 신탁통치 좌익과 우익의 대립 법제정과 정부수립 전쟁과 서울탈환 중공군의 개입과 분단의 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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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한국사 분단과정 [국제회의와 신탁통치 좌익과 우익의 대립 법제정과 정부수립 전쟁과 서울탈환 중공군의 개입과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국제회의와 신탁통치
Ⅱ. 좌익과 우익의 대립
Ⅲ. 법제정과 정부수립
Ⅳ. 전쟁과 서울탈환
Ⅴ. 중공군의 개입과
분단의 고착화
-참고자료

본문내용

전투를 치루었다. 하지만 혼란 중 제 24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면서 대전마저 북한에게 내주었다. 반면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던 중-동부 전선은 상황이 달랐다. 우선 한국군은 미군보다 정신력이 강했다. 그들은 그들의 땅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장비면에서는 북한에 열세였지만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공격적인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 때 노획한 무기가 모두 소련에서 제작된 신제품임을 확인했고 이것으로 소련군이 북한군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는 증거를 잡았다.
⑥ 1950년 7월 25일 낙동강 - 낙동강 방어선
금강전선과 대전이 함락당하고 병력이 거의 없었던 호남지방도 쉽게 북한군에 장악됐다. 대구에 있던 수도도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으며 이제 대한 민국은 한반도의 끝에 위치한 부산을 중심으로 남북 135km 동서 90km라는 한 줌도 안되는 땅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당시 미 제 8군 사령관은 낙동강을 따라서 방어선을 설정하고, 미국 장병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있는 곳도 없다. 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한편, 낙동강의 '영산 전투'에서 미군은 최대 격전을 벌였다.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낙동강 전선은 점점 좁아졌고, 한 때 미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을 세울만큼 급박했지만 9월 상황이 호전됨에 따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던 김일성의 희망은 사라졌다.
⑦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仁川上陸作戰)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UN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UN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제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⑧ 1950년 10월 1일 38도선 - 북으로 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워커는 인천에 상륙한 군대가 서울에 진입할 무렵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떨어졌고 재빨리 북쪽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특히, 미군은 777부대라는 특수 임무부대를 만들어 다른 부대보다 먼저 서울로 진격하게 하였고 26일에는 인천에 상륙 했던 부대의 일부와 서울 아래쪽의 오산에서 만났다. 오산은 한국 전쟁 초기에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29일 오늘 약 10일 동안 격렬한 전투끝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고 한국 정부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여 말문을 쉽게 열지조차 못했지만 서울을 되찾도록 열심히 싸운 유엔군과 한국군 모두를 치하하였다. 모든 국민도 다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폐허가 된 서울, 사람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비참함 뿐이었다.
2 . 생각 정리
최근의 뉴스 보도에서 북한의 평양방송이 “남한의 무력증강은 6.15통일시대의 흐름을 타고 좋게 발전해온 북남관계를 파괴하고 대결분위기를 고취하며 외세와 야합하여 북침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남침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
이 아닌 남한이 북한을 침공한 것이 맞으며 남한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남침 설을 남한과 미국이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라고 주장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전쟁의 발발에 대해 조사를 하다보니 여러 가지 정황상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남침설이 맞는 것 같다. 이제 남침이나 북침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략함.
이냐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남과 북이 함께 통일에 대해서 논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3 . 참고 자료
① http://user.chollian.net/~prokhr/war (한국전쟁) 사이트 참고
②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저) 참고
③ NAVER '6.25 한국전쟁' 컨텐츠 검색 참고
Ⅴ . 중공군의 개입
1 . 중공군의 개입과 분단의 고착화
당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팽팽한 대립 간에 터진 전쟁이 6.25이다. 당시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하고 북으로 진격을 계속하였으며. 그것에 위기를 느낀 북한군이 중국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태평양쪽으로는 공산주의국가는 북한이 유일했다. 때문에 지리적인 요충지를 잃을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공산주의국가의 중국이 파병을 결정했고 인해전술로 한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중국의 인해 전술로 남한과 UN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국과 소련은 협상 하에 휴전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과 북이 갈라놓았다.
2 . 생각 정리
한 때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낙동강까지 밀렸던 남한군은 그 후 UN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북한지역의 대부분을 수복하기에 이르렀지만 한반도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한반도 수복의 꿈은 좌절 되고 만다. 더 이상의 피해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군과 소련군은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갈라놓았고 이것이 50년이 넘은 현재 까지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 참으로 씁쓸할 뿐이다. 비록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분단되었지만 통일은 꼭 자주적으로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3 . 참고 자료
①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 금성출판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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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8.04.20
  • 저작시기201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53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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