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별곡(翰林別曲) 그 진풍경(珍風景)의 현장으로 - 아부와 아첨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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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림별곡(翰林別曲) 그 진풍경(珍風景)의 현장으로 - 아부와 아첨 그래도 괜찮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0. 들어가며
1. 원문
2. 원문의 어구 해석 및 부연설명
3. 앞선 부연설명을 바탕으로 한 현대어 해석
4. 기존 연구에 입각한 내용정리
5. 사회적 배경과 그에 따른 각 장의 내용 연구
6. 창작시기 논란
7. 나오며

본문내용

1259)로 추정한다. 또한 노래가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얼마간의 시기를 두고 발생하는데, 고종조 전부터 태동한 경기체가의 움직임이 고려 고종조의 말에 가서 기록된 <<한림별곡>>이라는 작품으로 산출했다는 것 전규태, 고전시가연구, 고려원, 1986, p. 397
이다.
한편 성호경은 <<한림별곡>>작품 내외에서 찾아지는 몇 가지의 징표들을 논거로 제시 성호경, 한림별곡의 창작시기 논변 -고려 고종대 창작설을 부정함
(국어국문학회편, 고려가요악장연구, 태학사, 1997) p.393~411
함으로써 <<한림별곡>>의 창작시기가 고종대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고종대 또는 그 이후의 고려시대 문헌에 <<한림별곡>>에 대한 논급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림별곡>>이 고종대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그 창작 이래 고려시대 동안에는 그리 알려지지 못했거나, 고려시대의 말기에서야 지어졌거나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생기는데, 15세기 초엽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둘째, 6장에 나오는 해금(奚琴)의 문제를 통해 볼 때, <<한림별곡>>은 몽고인들 또는 몽고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해금이 고려에 들어오게 되었던 13세기 후반 이래의 작일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3장의 오생 유생의 문제를 통해 볼 때, 13세기 전반까지는 그들에게 해당되는 명필이 보이지 않은데, 그렇다면 한림별곡이 고종조에 지어졌을 가능성은 낮다며, 만약 14세기 중엽의 명필들인 오동(吳仝), 유도권(劉道權) 오동과 유도권은 이색(李穡)의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나온다. 이들은 둘 다 그렇다할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벼슬이름이 없이 유자(儒者)를 칭하는 生을 붙힌 것도 자연스럽다.
에 비의할 수 있다고 하면 한림별곡은 14세기 중엽 이래 말엽에 이르는 사이까지 그 창작시기가 늦어진다고 한다.
넷째, 8장의 동성애의 문제를 볼 때, 한림별곡은 몽고인들의 성습속(性習俗)과 원(元)나라 숙위(宿衛)에서 성행하던 남색이 고려사회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13세기 후기의 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섯 째, <<한림별곡>>이 원(元)나라 산곡(散曲)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원나라 산곡의 영향이 고려에 미치게 되었던 13세기 후반 이래의 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한림별곡>>의 각 연에서 후절의 앞에는 ‘葉’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과 중국의 음악과의 관련성을 찾고자 할 때 가장 비슷한 것이 원나라 산곡의 엽아(葉兒)라는 것이다. 경기체가 형식의 전절과 후절의 확실한 구분은 산곡의 帶過曲에서 보이는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나오며
지금까지 <<한림별곡>>에 관하여 (조금은 두서없이) 살펴보았다. 먼저, 국정교과서에 전문이 실리지 않아 전 8장으로 이루어진 전문의 원문을 정리해보았다. 원문을 정리하고서는 사물과 사실을 열거한 각각의 한자어의 의미파악이 어려워 <<고전시가의 이해>>라는 책을 중심으로 각각의 한자어구를 확인했다. 인물의 경우 그들의 출생과 사망년도 및 전반적인 활동내용을 중심으로, 서적이나 서체는 작자 중심으로, 붓의 종류나 술의 종류, 꽃의 종류, 산의 종류는 한자어의 의미 자체와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마지막 8장 그네놀이의 경우 사회적 배경 및 역사적 상황과 연관 지어 성호경님의 의견(원-몽고-에서 들어온 동성애적 모습)을 따르는 바이다. 현대어 해석의 경우 매끄러운 의미 전달을 위해 다소의 의역(조사 첨가)을 하기도 하였다. 기존 연구를 통해 각 장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았으며, 사회적 배경(무신인 최씨 집권기와 몽고 항쟁)을 통해 <<한림별곡>> 이면의 내용에 귀 기울여 보았다. 마지막으로 창작시기 논란에 관한 몇몇 의견은 <<한림별곡>>의 내용자체에 치중하여 1장에 나오는 인물의 생몰 연대 중심으로 보느냐와 <<한림별곡>>이 기록되어 있는 다른 문헌이나 전체 내용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기에 어느 편을 따르기 보다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모두를 꼼꼼히 살펴 어느 쪽의 논거가 더 타당한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한림별곡>>이 기록되어 있는 <<고려사>>나 <<악장가사>>가 조선의 문헌이기에 조선인들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이전에 고려가요의 작품을 읽었기에 그러한지 생각보다 <<한림별곡>>의 내용이 퇴폐적이거나 향락적이라는 느낌은 덜 했다. 오히려 넘치는 자부심과 오감을 만족시킬 법한 풍류를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고려가요가 민중의 창작품이오, <<한림별곡>>을 위시한 몇몇의 경기체가는 귀족의 창작품임을 감안할 때, 선비들의 체면과 체통 등을 고려하면 다소 향락이 두드러진 작품임은 인정한다.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이나 <음란서생>을 통해 혹은 중세를 다룬 역사서나 드라마를 통해 그들의 규율이나 삶의 방식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한림별곡>>의 방탕이나 넘쳐나는 오만함은 더욱 자극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한림별곡>>의 ‘기가 막힌’ 것들의 나열과 그를 아울러 시상을 강하게 강조하며 마무리하는 표현 방식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임은 틀림없다. 그 때문에 <<한림별곡>>이 신흥사대부의 잘난 척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노래 부르며, 흥을 느껴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물론 그러니 당대에 그리 유행하지 않았겠는가. 훌륭한 것이 하나인 것도 좋지만 여럿이 되면 더욱 파워풀해지는 법이다. 우리나라에도 뒤쳐지는 인구와 면적, 민족성을 극복하고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인재와 훌륭한 물건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고려말과 조선초 <<한림별곡>>의 흥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문헌
공석하, 우리 고전時 감상, 뿌리, 1994
성낙희, 조연숙 편저, 고전시가의 이해, 국학자료원. 2006
성호경, 한림별곡의 창작시기 논변 -고려 고종대 창작설을 부정함
(국어국문학회편, 고려가요악장연구, 태학사, 1997)
전규태, 한국시가연구, 고려원, 1986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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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7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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