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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히 줌인 또는 줌아웃하는 영화의 어법은 ‘해부’의 방법과 다를 게 없다. 성공한 외과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신적인 존재처럼 생각되었던 스티븐, 그의 권위가 지배하는 완벽해 보였던 하나의 가정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거세게 흔들리고 끔찍하게 해체된다. 마틴의 저주가 하나둘씩 실행되며 그들의 목숨이 절벽으로 내몰릴수록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보다는 생존을 위한 전략과 가식이 돋보인다.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특별하다고 믿었던 존재와 애정과 신뢰로 탄탄하게 건설했다고 믿었던 가족 혹은 관계망의 실체는 특별함을 꿈꾸는 한낱 나약한 개인의 얄팍한 욕망과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의 의존, 임시적인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 가족의 붕괴 앞에서 마틴은 아무렇지 않게 스파게티를 먹어 치우며 실존은 이렇게나 우스운 것임을 비꼰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서, 희생양 막내 밥의 죽음은 스티븐이 눈을 가린 채 제자리에서 돌다가 멈춰 쏘는 식으로, 즉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그렇게 된 데에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가 없다.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는 <킬링 디어>의 진짜 비극은 그런 것이다.
<킬링 디어>에서 광기는 그러한 실존의 해부, 살을 가르는 절개의 잔혹함이며, 그 해부의 과정이 이끌어 낸 치명적인 결과다. 전자는 내 것을 빼앗겼으니, 네 것을 빼앗아도 좋다는 고요한 분노, 무너진 실존을 통해 얻은 해체에 대한 열망, 하나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앗아가는 악이 ‘정의 구현’이 되고, 말도 안 되는 저주의 법칙이 현실이 되는 마틴의 광기를 뜻한다. 후자는 메스와 같이 날카로운 마틴의 광기에 의해 존재와 관계를 감싸는 허식이 갈라지며 솟아오르는 스티븐과 그의 가족들의 광기, 그들의 감춰진 어둡고 나약한 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다리, 온 힘을 다해 팔딱대지만 병든 심장을 의미한다.
끝으로, 총구를 든 스티븐으로서, 또는 총구가 겨누고 있는, 베개 커버를 뒤집어 쓴 대상으로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죄목을 마주하게 된다. ‘신성’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추고, 꾸며내며, 희생시키는가? 기만과 허위로 실존을 자만한 죄, 무고한 사슴을 피로 붉게 물들인 죄는 우리에게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광기라는 주제는 우리를 이토록 가차없이 솔직하게 만든다.
각주 :
1) “원한에 찬 기이한”은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The Telegraph』에서 영화비평가 로비 콜린(Robbie Collin)이 <킬링 디어>에 대한 리뷰로 언급한 “난폭하게 불편하고, 원한에 찬 기이한 그리스 비극(a wildly uncomfortable, venomously funny Greek tragedy)”이라는 문구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기이한’에 상응하는 원어가 ‘eccentric’이나 ‘odd’, ‘bizarre’가 아닌, ‘funny’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funny’에서는 ‘이상한’과 함께 ‘재밌는’과 ‘우스운’이라는 뉘앙스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본글의 논지에서도 점차 명확해지듯이, 인간의 실존과 정의에 대한 <킬링 디어>의 조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2) 아가멤논이 왜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숲에서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한 뒤 자신이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우쭐거렸다는 설, 이피게네이아가 출생한 해에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헌납하겠다는 기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설, 혹은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가장 아름다운 가축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여신과의 약속을 어겨 아가멤논이 대신 받았다는 설 등이 있다.
<킬링 디어>에서 광기는 그러한 실존의 해부, 살을 가르는 절개의 잔혹함이며, 그 해부의 과정이 이끌어 낸 치명적인 결과다. 전자는 내 것을 빼앗겼으니, 네 것을 빼앗아도 좋다는 고요한 분노, 무너진 실존을 통해 얻은 해체에 대한 열망, 하나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앗아가는 악이 ‘정의 구현’이 되고, 말도 안 되는 저주의 법칙이 현실이 되는 마틴의 광기를 뜻한다. 후자는 메스와 같이 날카로운 마틴의 광기에 의해 존재와 관계를 감싸는 허식이 갈라지며 솟아오르는 스티븐과 그의 가족들의 광기, 그들의 감춰진 어둡고 나약한 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다리, 온 힘을 다해 팔딱대지만 병든 심장을 의미한다.
끝으로, 총구를 든 스티븐으로서, 또는 총구가 겨누고 있는, 베개 커버를 뒤집어 쓴 대상으로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죄목을 마주하게 된다. ‘신성’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추고, 꾸며내며, 희생시키는가? 기만과 허위로 실존을 자만한 죄, 무고한 사슴을 피로 붉게 물들인 죄는 우리에게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광기라는 주제는 우리를 이토록 가차없이 솔직하게 만든다.
각주 :
1) “원한에 찬 기이한”은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The Telegraph』에서 영화비평가 로비 콜린(Robbie Collin)이 <킬링 디어>에 대한 리뷰로 언급한 “난폭하게 불편하고, 원한에 찬 기이한 그리스 비극(a wildly uncomfortable, venomously funny Greek tragedy)”이라는 문구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기이한’에 상응하는 원어가 ‘eccentric’이나 ‘odd’, ‘bizarre’가 아닌, ‘funny’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funny’에서는 ‘이상한’과 함께 ‘재밌는’과 ‘우스운’이라는 뉘앙스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본글의 논지에서도 점차 명확해지듯이, 인간의 실존과 정의에 대한 <킬링 디어>의 조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2) 아가멤논이 왜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숲에서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한 뒤 자신이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우쭐거렸다는 설, 이피게네이아가 출생한 해에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헌납하겠다는 기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설, 혹은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가장 아름다운 가축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여신과의 약속을 어겨 아가멤논이 대신 받았다는 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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