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학기 전근대한일관계사 중간시험과제물 A형(18세기까지의 한일관계사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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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8세기(~1799년)까지의 한일관계사 사적지 관련 3곳 이상을 답사하고 해당 사적지에 대한 설명 및 관계된 사건, 관련 사료, 그리고 자신의 감상을 빠짐없이 작성 하시오.


- 목 차 -

I. 서 론

Ⅱ. 본 론
1. 홍주의사총
2. 벽제관지
3. 행주산성

III. 결 론

참고문헌


** 함께 제공되는 참고자료 한글파일 **
1. 군산항.hwp
2. 금정산성.hwp
3. 수원 화성행궁.hwp
4. 영가대.hwp
5. 홍주의사총.hwp

본문내용

I. 서 론

일본에게 한동안 강점당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허나 그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용어를 접하며 살고 있다. 우리 역사의 이면에는 당시 친일했던 상당수의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 행세하고 있는 굴곡된 현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식민사관은 한일합방을 합리화하려는 사관으로서 정교한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좋지 못한 기억들은 21세기를 개척해나가는 우리미래에 장애가 될 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36년 간의 일본에 의한 지배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이성적인 비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이민족을 말살•소멸시켜 스스로의 제국 내 종속신분층으로 만드는 데 중 점을 둔 악랄한 성격의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는 지배민족에 부당한 지배자 의식을 심고, 피지배민족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감을 갖게 하지만, 대한 식민지 지배는 일본인의 의식을 구속하고 한국인에 대한 편견, 한국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낳았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오랜 민족의 전통을 가지는 한민족의 격렬한 민족적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저항은 강력한 군사력 아니고는 억압할 수 없으므로, 일제의 대한 식민지 지배가 틀이 잡힌 후에도 군사적 억압체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군사적 억압으로도 수천 년에 걸친 강고한 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이 레포트는 18세기(~1799년)까지의 한일관계사 사적지 관련 홍주의사총, 벽제관지, 행주산성을 답사하고 해당 사적지에 대한 설명 및 관계된 사건, 관련 사료, 그리고 자신의 감상을 서술하였다.


II. 본 론

1. 홍주의사총

1) 사적지에 대한 설명
홍주의사총은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조선 세종 때 처음 쌓기 시작해 문종 1년(1451년)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고종 7년 경오년(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동·서·북 세 곳에 문을 다시 세우고 홍예문이라는 남문을 세웠다. 경오년 2월 27일에 준공한 다음 조정에 보고하여 같은 해 10월 15일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으로 명명했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1975년에 복원하였다. 특히 조양문은 낮에 보는 것보다 저녁에 야경을 감상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조양문의 야경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는데 자동차의 불빛과 어우러진 조양문은 남대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홍성의 야경을 대표하는 명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주아문은 역대 홍주 목사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의 외삼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워졌다.
홍주아문이라는 현판은 대원군이 사액한 것으로,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지금은 군청 정면에 위치해 있다. 현재 홍성 군청 내에 있는 안회당은 홍주목의 동헌으로 22칸의 목조기와다. 역대 홍주목사와 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 건물로 현재 군청 후정에 위치하고 있다. 한응필 목사가 대대적으로 개축한 후 대원군이 안회당이란 편액을 하사했으나 을유해방 이후에 분실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후퇴시킨 일도 있었다.
여하정은 목조와즙의 육각 수상정으로 현재 군청 내에 있고, 규모는 3평 5합 5작에 불과하지만 주위의 고목과 연꽃·금붕어가 있는 연못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이 건물은 홍주 목사의 휴식공간으로 홍주 목사 이승우가 세웠다. 우리는 보통 관청 하면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으로 홍성의 밤거리를 아름답게 수놓는 상징물이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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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년/학기4학년/2학기
  • 해당자료학과일본학과
  • 자료출간일2023.10.04
  • 파일형식압축파일(zip)
  • 자료번호#1225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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