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見性)의 심성론적(心性論的) 해명(解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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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견성(見性)의 기연(機緣)
⑴ 말 끝에 깨달음[言下便悟]
⑵ 행위 끝에 깨달음
⑶ 무정(無情)의 설법(說法)

Ⅲ. 지각경험(知覺經驗)과 견성(見性)의 관계

Ⅳ. 견성(見性)의 심성론적(心性論的) 의미

Ⅴ. 결론

본문내용

正藏51-218b)
이와 같이 나타나는 일심(一心)의 작용(作用)에 관해서는 임제(臨濟)도,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꿰뚫어니,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고,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이야기 한다고 하고,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닌다고 한다"
) 心法無形 通貫十方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 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本是一精明 分爲六和合(『臨濟錄』-宣和本- 大正藏47-497c)
라고 똑같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식(識)으로 파악되지 않는 성(性)을, 식(識)을 생멸(生滅)시키는 작용으로 파악하여, 식(識)과 성(性)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선종(禪宗)의 심성론(心性論)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相)인 식(識)을 생멸시키는 작용인 성(性)과, 성(性)에 의하여 생멸하는 식(識)으로 나타나는 상(相)의 두 측면이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일심(一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심성론의 입장에서 보면, 미혹(迷惑)과 깨달음은 모두 일심(一心)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미혹은 자기의 본심(本心)에 미혹한 것이고 깨달음은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것"
) 迷卽迷自家本心 悟卽悟自家本性(『四家語錄』「馬祖錄」 卍續藏119-813a)
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미혹이란 일심(一心)의 작용 곧 성(性)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인 식(識)만을 알고, 그 식(識)을 만드는 작용인 성(性)을 모르는 것이므로, 왜곡되게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깨달음이란 식(識)과 함께 그 성(性)까지 알아서 마음을 온전히 다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왜곡되게 알려지는 마음이라는 것은 성(性)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서, 식(識)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Ⅴ. 결론
돈오(頓悟)의 사례는 육조(六祖)의 경우처럼 경전 한 구절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법안(法眼)이 열릴 수도 있고, 마조(馬祖)의 경우처럼 스승의 설명에 의해 바른 안목(眼目)이 열릴 수도 있으며, 백장이나 임제의 경우처럼 스승이 코를 비틀거나 두들겨 패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알아챌 수도 있으며, 향엄(香嚴)의 경우처럼 수동적인 우연한 경험을 통하여 마음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 까닭은, 보고·듣고·접촉하는 등의 모든 경험이 전부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사선(祖師禪)에서 말하는 마음에는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육근(六根)을 통하여 식(識)으로 경험되는 육진경계(六塵境界)의 상(相)이 모두 마음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공(虛空)처럼 식(識)으로는 경험할 수는 없지만 식(識)을 만들어내는 작용(作用)인 성(性)이 또한 마음의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드러나는 모습으로 경험되는 마음과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는 마음은, 사실 논의(論議)의 편의상 하나의 마음을 두 측면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고,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다시 말하여, 식(識)으로 경험되는 마음인 육진경계(六塵境界)의 상(相)의 세계는, 곧 식(識)으로 경험되지 않는 마음인 성(性)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상(相)과 성(性)을 말하지만 상(相)과 성(性)은 본래 하나인 일심(一心)이고 따로 나누어진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은 식(識)으로 드러나는 상(相)만을 알고 성(性)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방편상(方便上) 나타나지 않는 마음인 성(性)이 경험으로 나타나는 마음인 상(相)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고 하여 견성(見性)해야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相)은 가상(假相)이고 성(性)이 실상(實相)이라 하는 것이지만, 진실을 말하면 상(相)이니 성(性)이니 하는 것이 따로 없고 다만 일심(一心)일 뿐이다. 이 때문에 식(識)으로 경험되는 상(相)을 통하여 마음을 나타낼 수가 있고, 이와 같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을 일러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識)으로 경험되는 마음을 상(相)으로만 알고 있는 범부중생은, 비록 선지식(善知識)이 말·소리·몸짓 등을 통하여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어도 그것을 다만 상(相)으로만 볼 뿐 마음으로 보지는 못한다. 즉 보이지 않는 마음인 성(性)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견성(見性)의 어려움이 있고, 또 견성(見性)이 비연속적인 초월(超越)의 경험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즉 이제까지의 경험 속에서 유형(有形)의 상(相)으로만 알았던 식(識)이 동시에 무형(無形)인 성(性)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려면, 식(識)의 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초월적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식(識)의 껍질을 부수고 견성(見性)하는 것은 마치 육근(六根) 이외에 다시 하나의 눈을 더 얻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양(懷讓)은 마조(馬祖)에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道)와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본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견성(見性)이란, 마음이 마음 자신을 자각(自覺)하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끝-
참 고 문 헌
『華嚴經』
『大般涅槃經』
『楞嚴經』
『六祖壇經』
『四家語錄』(『卍續藏』119)
『臨濟錄』-宣和本-(『大正藏』47)
『第五門悟性論』 (『大正藏』48)
『禪源諸詮集都序』(『大正藏』48)
『景德傳燈錄』(『大正藏』51)
『 仰錄』 禪林古鏡叢書13. (경남. 장경각. 불기2538)
『曹洞錄』 禪林古鏡叢書14. (경남. 장경각. 불기2538)
大慧宗 『宗門武庫』 백련선서간행회 역. 禪林古鏡叢書 25. (경남. 장경각. 불기2540)
『백운스님어록-白雲和尙語錄-』 無比 譯註(서울. 민족사. 1996)
鈴木大拙 『禪問答と悟り』 (鈴木大拙禪選集 新裝版2(東京. 春秋社. 1978)
柳田聖山 『禪籍解題-2, 唐代禪籍-』 殷勤 中文譯 (『俗語言硏究』 第三期 1996. 卷末資料.)
김태완 「중국 조사선의 연구」 부산: 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논문, 2000.2

키워드

견성,   심성론,   해명,   지각경험,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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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1.29
  • 저작시기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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