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비의 논리, 회호적 관계, 선문답―종교간 대화와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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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즉비의 논리

Ⅱ.회호적 관계

Ⅲ.선문답

Ⅳ.공의 장

Ⅴ.즉비와 회호의 종교다원적 함축성

본문내용

리 보잘 것 없는 사물이라도 존재하는 한, 그 있다는 현존 속에는 만물을 연결하는 회호적 관계의 그물이 쳐져 있다. 혹은 그 '있다'에서 세계가 '세계로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그 자체적인 존재 방식이고...'사물' 자체의 모습인 것이다."
) 『종교』, p. 222.
그리고 이것이 니시타니적 의미에서의 "사랑", 즉 나를 나로서 보장해주는 "절대적 무관계의 조화"이다.
) Nishitani Keiji, "The I-Thou Relation in Zen Buddhism", p. 56.
또 나를 본원적인 나로서 보장해주기에 종교의 장인 것이다.
Ⅴ. 즉비와 회호의 종교다원적 함축성
이렇게 즉비의 논리, 회호적 관계에서는 일체 사물의 주인됨, 절대 중심을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독특성을 지닌 주인이라는 말이다. 소재를 약간 바꾸어 이것을 오늘날 종교적 현실 안으로 가져오면, 무엇보다 다양한 종교들의 목표들 및 한 전통 안에 있는 개개인의 차별성까지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나의 관점만이 참일 수는 없다. 모순되는 듯한 다양한 관점들이 모두 참일 수 있다. 모두가 절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참됨은 우열을 재는 '비교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차이를 하나로 통일하는 태도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들 모두에서 '최상급'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그 보는 주체도 '최상급'이 된다. "공의 장에서는 도처가 중심"이라는 니시타니의 표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모두를 '리얼하게' 살릴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때 이른바 '다원주의'(多元主義)도 성립된다. 모두에게서 절대 중심을 본다는 점에서 다원주의는 종교들의 차별성과 주체성을 긍정하는 이른바 '차별주의'여야 할 것이다. 종교들이 대화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차별, 즉 '다름'을 용납해야 한다. "타자들의 타자성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다."
) Heinrich Dumoulin, Christianity Meets Buddhism, tr. John C. Maraldo(La Salle, Illinois: Open Court Publishing Co., 1974), p. 54.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다원주의의 근거가 된다. 특정 기준에 따라 종교들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파니카(Raimundo Panikkar)도 종교들의 궁극적 체계란 특정 기준에 따라 비교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비교될 수 없다는 그러한 사실이 도리어 각 종교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드러나도록 해준다고 본다.
) Raimundo Panikkar, "The Jordan, the Tiber, and the Ganges', The Myth of Christian Uniqueness: Toward a Pluralistic Theology of Religions(New York: Orbis, 1988), p. 110.
종교간 차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적극 받아들인다면, 차별적인 여러 종교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공존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 피터 버거)은 오히려 종교들이 저마다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계기이다. 타종교가 자기 종교를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마크 하임(S. Mark Heim)은 이렇게 말한다.
"다양성은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능한 한 많은 증거와 가치들을 포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똑같은 증거 앞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투신을 하게 하고 다른 방향들을 발전시켜 나가게 한다는 사실을 삼가 받아들이도록 자극하고 도전하는 문화적 혁신 방식이다. 여러 시각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은 서로서로에게 생명의 피(lifeblood) 바로 그것이 된다."
) S. Mark Heim, Salvations: Truth and Difference in Religion(New York: Orbis, 1995), p. 139.
종교적 목적을 다양하게 보는 것이 현실의 끊임없는 변화에 더욱 어울린다. 이처럼 종교가 여럿이라는 현상 보고에 머물지 않고서, 종교가 여럿이라는 사실 자체를 종교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여럿이라는 현상(plural)을 종교적 차원에서(religious) 보아야 한다(ism)는 뜻이다. 그럴 때에만 참으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만 자신과 타자가 바로 그 자신과 타자가 된다. 모두가 "절대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종교 상황은 단순한 정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와 너를 나와 너로서 살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이며, 새로운 창조를 낳는, 창조의 원동력이다. 다양함, 다름을 받아들일 때에 내가 언제나 새롭게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종교 현상 자체에 종교적 깊이가 들어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종교의 핵심적 내용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종교다원주의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산에 오르는 길이 다양할 뿐 아니라 우뚝 솟은 산들 자체가 여럿이다. 파니카가 지적하듯이 "중심은 지구(특정 종교)도 아니고 태양(하느님, 초월, 절대자)도 아니다. 오히려 태양계는 저마다의 중심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은하계는 다른 은하계 주위를 서로서로 돈다. 독점적 중심이란 없다."
) Raimundo Panikkar, Ibid., p. 109.
모두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가 "공의 장에서는 도처에 중심이 있다"고 말할 때의 그 다중심이다. 니시타니의 표현대로 일체의 작은 사물도 절대 중심인 것이다. '즉비의 논리'와 '회호적 관계'는 일체 존재의 자기동일성과 상호 융통성을 보여주며, 타자 앞에서의 자기부정(非)을 통한 자기긍정(卽)에 대해 말한다. 아니, 그 자기부정(非)이 곧 자기긍정(卽)임을 말한다. 선문답에서처럼, 너는 나를 부정하게 함으로써 나를 다시 세워주는 나의 주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런 방식으로 긍정된다. 다양한 종교들, 종교인들, 세세한 이념과 언행까지도 이렇게 해서 그 존재론적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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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7페이지
  • 등록일2002.03.18
  • 저작시기2002.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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