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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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머리

2. 마당의 모습
2-1. 놀이꾼
2-2. 줄거리

3. 짜임새와 속뜻
3-1. 짜임새
3-2. 어딩이 부자와 문둥이들
3-3. 땅서낭의 자취와 춤
3-4. 처용
3-5. 속뜻

4. 마무리

본문내용

곳을 뒷 사람들이 달밝은 거리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처용노래와 처용춤과 탈놀음을 만들었다.(月明巷. 在金城南. 新羅憲康王 遊鶴城 -中略- 每月夜歌舞 於是竟不知所在 時以爲神 其歌舞處 後人名爲月明巷 因作處容歌 處容舞 假面以戱, 新增東國與地勝覽 卷第二十一 慶州府 古跡.)
에서 벌였던 「처용굿」을 그대로 닮았다는 사실도 드러났고, 동해안 '광인굿' 속의 「여처낭굿」의 틀거리와도 아주 닮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처용굿에서는 처용이 아내를 괴롭히던 역신과 싸우는 것으로 굿의 줄거리를 이루듯이 여처낭굿에서는 '네 처낭'
) 여기 '처낭'이 넷인 것은 신라 '처용'을 넷이었다고 적은 『삼국사기』를 떠올리게 한다(有不知所從來 四人 詣駕前歌舞, 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憲康王 五年 三月).
이 환자를 괴롭히던 '여처낭 모자'와 싸우는 것으로 굿의 줄거리를 이룬다. 역신이 처용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듯이 여처낭 모자가 네 처낭 앞에 끌려와서 신세를 하소연하며 용서를 비는 것이라든지, 처용이 춤과 노래를 부르며 짐짓 물러나듯이 네 처낭이 자비를 베풀어 먹을 것을 넉넉히 내린다든지, 역신이 감동하여 서약을 하며 쫓겨나듯이 여처낭 모자가 겁먹고 용서를 빌며 쫓겨나는 것이라든지, 그런 틀거리가 처용굿이나 여처낭굿이나 모두 오문둥놀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 다만 광인굿의 처낭은 허수아비로 높은 당 위에 서 있기만 하여서 몸소 굿을 벌이는 처용놀음이나 오문둥놀음과 적잖이 다르다. 서낭(神)은 당 위로 물러나 있고 화랭이가 서낭의 말을 대신 하면서 질병을 쫓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처용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런 문제는 처용의 변모를 무속 신앙 안에서 새로 따져볼 만한 것이라 하겠다.
.
이래서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은 본디 땅서낭이 질병서낭을 쫓아내는 굿놀음이었던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듯하다. 그것은 천년 전에 신라 서울에서 벌였던 처용놀음이나 오늘날 동해 바닷가에서 벌이는 여처낭굿과 아주 닮은 그 뼈대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굿이라는 속살은 사라지고 놀이놀음으로만 남아서 얼핏 보아서 드러나는 겉모습이 크게 달라졌을 따름이다.
4. 마무리
너절하게 말이 너무 길어졌지만, 이제 이야기한 바를 간추려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첫째,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은 땅서낭들이 질병서낭을 쫓아내는 굿놀음에서 자란 자취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이 굿놀음의 뿌리로는 세속에 나와서 글자로 적힌 신라의 '처용놀음'과 굿 안에 남아서 놀음으로 내려오는 동해안의 '처낭굿'을 꼽을 수 있겠다. 그것을 땅서낭의 놀음인 줄 모르고 '문둥이' 놀음으로 알게 된 것은 아주 가까운 요즘의 일이고, 십구 세기까지만 해도 곱사놀음이나 병신놀음으로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날로 올라갈수록 곱사나 병신의 모습으로 춤추는 놀이꾼들을 땅서낭이 나타난 것으로 알고 굿판의 사람들이 신앙심을 가지고 모두 함께 어울려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따라서 오광대탈놀음 전체가 그렇지만 더욱이 오문둥놀음은 마을이나 고을의 한 해가 탈없이 지나가도록 비는 새해의 마을굿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무서운 질병서낭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항복을 받아내는 오문둥놀음이야말로 마을(고을)의 한 해를 탈없도록 마련하는 굿의 알맹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오광대탈놀음을 정월 대보름 저녁에 놀았다는 사실도 그것을 뒷받침하거니와 정월 대보름 저녁이란 섣달 그믐날 밤부터 보름에 걸치는 설의 마을굿, 무엇보다도 지신밟기라는 마을 굿의 마무리로서 가장 큰 굿판이기 때문이다.
셋째,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으로 보면, 오광대 탈놀음에서는 문둥놀음 마당이 가장 으뜸 뿌리일 듯하다. 문둥놀음이 사악한 세력을 몰아내고 기쁨과 즐거움을 맞이하려는 굿놀음인데다가 모든 오광대에는 문둥놀음이 빠짐없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노(비비)와 사자놀음이라든지 오방신장놀음 같은 것들, 곧 굿놀음의 속살이 한결 잘 드러나는 마당은 문둥놀음이 굿놀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되면서 끌고 들어온 뒷날의 덧보탬일 것으로 보인다.
넷째, 놀음의 짜임새에서나 탈의 모습에서나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은 우리 나라 탈놀음 마당들 가운데 가장 깊은 역사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오광대들의 문둥놀음도 그 속살로부터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주오광대의 다른 마당들도 좀더 꼼꼼하게 살피면 오문둥놀음과 같이 옛날의 속내를 감추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볼 만하다.
끝으로, 우리의 탈놀음이 어디서 왔느냐는 해묵은 물음에도 새로운 풀이의 실마리 하나를 보탰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마을굿에서 왔다는 주장과 궁중 산대놀이에서 왔다는 주장이 맞선 듯하지만, 그건 어느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선 내려오는 곳에 따라 서울과 개성에 가까운 경기도의 산디놀이와 황해도의 탈춤들은 궁중 산대놀이에서 많은 피를 받은 듯하고, 그밖의 지방에서 내려오는 탈놀음들은 마을굿에서 더 많은 피를 받고 자라났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네 탈놀음의 본디 뿌리는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훨씬 더 깊은 옛날 신화 시대까지 내려 밖혀 있는 듯하다. 땅서낭(地神)들이 질병서낭(疫神)과 싸움을 벌이고 쫓아내는 놀음은 궁중에 산대놀이가 벌어지던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더 오래된 것이기에 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궁중의 산대놀이로 들어간 자취라든지 궁중 탈놀음과 마을의 탈놀음 사이에 주고 받은 자취를 또렷하게 찾아서 밝히는 일일 뿐이다.
이제 이야기를 끝내자니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오문둥놀음과 더불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여러 오광대의 문둥놀음을 돌아보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우리네 여러 탈놀음 안에 싸잡혀 있는 병신놀음들과 탈놀음과 상관없이 내려오는 병신춤(일테면 밀양 백중놀이에서 벌어지는 것)도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앞의 것은 오광대 탈놀음들의 뿌리와 계열을 올바로 아는 일에 보탬이 될 터이고, 뒤의 것은 우리 겨레가 땅서낭을 섬겼던 자취를 더듬는 일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것들을 따로 곰곰히 다루어볼 짬이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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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01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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