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다. 여기에서 융엘은 너무도 빠르게 새 시대적인 정신상황을 과학-기술적 의식과 더불어 일치시켜 버린 감이 있다.
둘째로, 융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은 하느님을 책임적으로 말할 수 있기 위한 요건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의미를 위한, 혹은 인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이 너무도 배타적이며 폐쇄적으로 확정되어져 버렸다. 그로써 기독교 교회와 신학 속에 나타나진 제반 다른 신앙 근거들을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덮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적 신론을 인간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폐쇄적으로 한정시키려는 노력은 다원화된 세계 종교 공존의 시대에 대화를 역행하도록 하는 난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듯 보인다.
셋째로, 새 시대적 무신론의 지평 속에서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음을 묻고 있는 융엘에게 있어서 그의 사고의 어쩔 수 없는 제약성을 보게 된다. 두 번째 비판점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새 시대적 무신론의 정신 상황을 통해서보다도 더욱 첨예하게 동양 종교들의 초월 경험, 세계 현실성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적 하느님 이해, 구원이해가 자기 동일화를 위해 더욱 도전 받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물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융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은 하느님을 책임적으로 말할 수 있기 위한 요건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의미를 위한, 혹은 인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이 너무도 배타적이며 폐쇄적으로 확정되어져 버렸다. 그로써 기독교 교회와 신학 속에 나타나진 제반 다른 신앙 근거들을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덮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적 신론을 인간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폐쇄적으로 한정시키려는 노력은 다원화된 세계 종교 공존의 시대에 대화를 역행하도록 하는 난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듯 보인다.
셋째로, 새 시대적 무신론의 지평 속에서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음을 묻고 있는 융엘에게 있어서 그의 사고의 어쩔 수 없는 제약성을 보게 된다. 두 번째 비판점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새 시대적 무신론의 정신 상황을 통해서보다도 더욱 첨예하게 동양 종교들의 초월 경험, 세계 현실성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적 하느님 이해, 구원이해가 자기 동일화를 위해 더욱 도전 받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물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