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인쇄술의 기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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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7.1 금속활자인쇄술 기원설
7.1.1 문종조 기원설
7.1.2 숙종조 기원설
7.1.3 1120년대 기원설
7.1.4 1230년대 이전 기원설

7.2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인쇄술
7.2.1「상정예문(詳定禮文)」
7.2.2「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7.2.3「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7.2.4「자비도장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7.2.5 기타(其他)

7.3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쇄기관(印刷機關)
7.3.1 서적점(書籍店)
7.3.2 서적포(書籍鋪)
7.3.3 서적원(書籍院)
7.3.4 주자소(鑄字所)

본문내용

방의 관서가 목활자를 조성하여 서적원에 바치자 서적원에서 이들 목활자로 당시에 필요했던 서적을 인출하여 보급하였다는 점에서 인쇄문화사적(印刷文化史的)으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7.3.4 주자소(鑄字所)
고려말에 설치된 서적원(書籍院)은 조선 건국초에도 활자인서(活字印書)의 기능을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문물과 제도가 정비되자, 태종은 독자적인 관계로 행정기구를 개혁하여 관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국시(國是)로 하는 문교정책(文敎政策)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학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사안이었으므로, 서적의 인출과 보급이 가장 절실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 3(1403)년 2월에는 고려말의 서적원의 제도를 본받아 독자적으로 주자(鑄字)와 인서업무(引書業務)를 관장하는 새로운 행정기관으로 주자소(鑄字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생략(省略)
한편 권근의 계미자(癸未字)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주자소(鑄字所)에서는 태종 3(1403)년 2월 18일부터 경연(經筵)에 소장된 고주(古註)가 달린「시(詩)」·「서(書)」·「좌씨전(左氏傳)」등을 자본(字本)으로 활자의 주조(鑄造)에 착수하여 수개월이 걸려 대자(大字), 소자(小字), 특소자(特小字) 등을 합쳐 수십만의 활자를 주성(鑄成)하였으며, 이에는 이직·민무질·박석명·이응 등이 감독하고 강천주·김장간·유이·김위민·박윤영 등이 직접 관장(管掌)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때에 주성(鑄成)된 활자를 그 간지(干支)를 붙여 '계미자(癸未字)'라 하고 계미자를 사용하여 인출한 서적을 '계미자본(癸未字本)' 이라 한다. 전래되는 계미자본을 보면 남송본(南宋本)에서 볼 수 있는 자체와 비슷한 구양순체(歐陽詢體)의 바탕에 둥근 필의(筆意)가 곁들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계미자는 조선조에서 최초로 주조한 동활자(銅活字)였으나, 주조술(鑄造術)과 조판술(組版術)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려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미숙하고 치졸하였다.
고려말의 흥덕사자본(興德寺字本)과 비교하면, ①활자 주조의 과정과 방법이 대폭 개량되었으나,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여전히 고르지 않고 또 자획(字劃)의 태세(太細)가 일정하지 않아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며, ②조판술(組版術)도 크게 개량되었으나, 사주(司周)를 고착시키고 상하변(上下邊)에 계선(界線)까지 고착시킨 인판(印版)을 만들어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각 줄에 꽉 들어맞도록 무리하게 밀착시켜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윗글자와 아랫글자의 획이 엇물려 있는 경우도 있어, 계미자(癸未字)는 고려말의 흥덕사자(興德寺字)보다 개량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기술이 미숙하였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계미자의 조판법(組版法)은 인판틀 바닥에 먼저 밀랍을 깔고 활자를 배열한 다음,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편편한 철판으로 위에서 고르게 눌러 활자면을 편편하게 하고, 열을 식게하여 개개의 활자가 굳어지면 인쇄하였다. 그러나 밀랍의 응고력이 약하여 인쇄 도중에 자주 흔들리고 기울어져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야 했으므로, 그 소비량은 많으면서도 하루에 찍어내는 수량은 겨우 수지(數紙)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또한, 활자는 그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밀랍에 잘 심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으나, 활자의 크기와 두께가 고르지 못하고 인판도 거칠게 만들어져 인쇄 도중에 동요가 잦았던 것이다.
전래되고 있는 계미자본(癸未字本)으로는「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제16권 1책, 제17권 1책),「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제4·5권 2책, 제6권 1책),「송조표전총류(宋朝表 摠類)」(제1권 1책, 제3권 1책),「신간류편력거삼장문선대책(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제5·6권 1책, 제7·8권 1책),「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제1권 1책, 제3권 1책),「지리전서동림조담경(地理全書洞林照膽經)」(상·하권 1책),「찬도호주주례(纂圖互注周禮)」(제1·2권 1책),「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小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의 서문 등이 있다.
또한, 계미자(癸未字)의 번각본( 刻本)으로는 태종(太宗) 18(1418)년과 숙종(肅宗) 13(1687)년에 청주목(淸州牧)에서 간행된「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제1-26권), 단종 2(1454)년에 금산(錦山)에서 간행된「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독직해(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제1-70권),「십일가주손자(十一家註孫子)」,「대학연의(大學衍義」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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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2.11.30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3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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