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왜(倭) 관계 기사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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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군에 의해 패퇴하고 임나가라의 성들도 함락되어 고구려 순라병의 통치 하에 잠정적으로 들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400년 전후한 시기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구가 신라를 침략하여 이를 물리쳤다는 기사는 많으나, 고구려군의 南下 救援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삼국통일 후의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한동안 그에 半종속되어, 寐錦 즉 마립간이 고구려에까지 가서 배알하기도 하고 국내의 정치도 그 간섭 아래 있었던 기억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14년(404) 甲辰條에는, 倭가 不軌하게도 帶方界(=황해도 방면)에 침입하여 殘兵(=백제군)과 和通하여 石城을 어떻게 하고 배를 이어 무슨 도발 행위를 하였는데, 광개토왕이 친히 平壤으로부터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倭寇를 격파하여 무수하게 참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안 보이는 글자가 더러 있어서 분명한 뜻은 알기 어렵다. 이에 해당하는 시기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방면에서 전쟁을 치루는 기사가 여러 번 나온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이되 백제가 왜를 傭兵처럼 이용한 것에 불과한 듯한데, 능비에는 백제보다 왜구의 존재가 부각되어 있다.
지금까지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 관계 기사들을 모두 살펴보았다. 신묘년 기사에는 아직 숱한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병자년 조와 갑진년 조의 기사에서는, 전쟁 장소로 보아 고구려의 상대가 가야와 백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상하게도 가야와 백제는 문장 맥락 속에서 객체로 나타나고 왜구가 주체였던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전체에서 倭가 나타나는 단락에만 유난히 缺字가 많고 문맥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대 시기부터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과 일본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관계의 기본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비문>을 포함하여 고대 한일 간의 史籍 및 고고학적 遺物 등에 대하여, 지금까지보다 훨씬 신중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자료:::
http://www.personweb.com/they%20said/textbook/text1.htm
http://www.2002culture.or.kr/kor/html/magazine12_22.asp
http://www.history.co.kr/Academy/korea/imna1.htm

키워드

광개토,   와릉비,   ,   일본,   고구려,   장수왕
  • 가격1,2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05.15
  • 저작시기2003.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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