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론과 방법- 각종 용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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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이론과 방법- 각종 용어 해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성 바르텔르미의 학살

[2]캐어하디

[3]대공포(大恐怖)

[4]페르시아전쟁(Greco-Persian Wars)

[5]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6]코이네

[7]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8]캔터베리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9]솔론(Solon)

[10]대불황(不況, great depression)

[11]삼부회(三部會)

[12]블로크(Bloch, Jean Richard)

[13]미슐레(Michelet, Jules)

[14]페브르(Febvre, Lucien)

[15]부르크하르트(Burckhardt, Jacob)

[16]로베스피에르

[17]영방국가(領邦國家, Territorialstaat)

본문내용

역사학을 공부하였으며, 유대인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 《레비 Lvy》(1912)로 인정을 받았다.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로서 문필활동을 했으며, J.게노와 함께 《유럽》지(誌)에서 논진(論陣)을 폈다. 르포르타주도 썼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표작은 이국적이며 관능적인 소설 《퀴르드의 밤 La Nuit Kurde》(1935), 사회옹호의 문제작 《툴롱항(港) Toulon》(1945), 정치평론 《세기의 운명 Destin du sicle》(1931), 연극평론 《연극의 운명 Destin du thtre, sance d’une culture》(1930) 등이 있다.
[13] 미슐레(Michelet, Jules)
프랑스의 역사가인 미슐레는 혁명의 격동기에 아버지의 인쇄소 일을 도우며 고학, 21세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립 고문서보존소 역사부장(1831), 파리대학 교수(1834),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1838)를 역임하였다. 저서에 《프랑스사(중세) Histoire de France》(6권, 1833∼1867) 《프랑스혁명사 Histoire de la rvolution franaise》(7권, 1847∼1853) 《프랑스사(르네상스∼프랑스혁명 전)》(11권, 1856∼1867) 《19세기사 Histoire du XIXe sicle》(3권, 1872∼1874) 등 역사에 관한 저작이 있으며, 만년에는 서정적인 자연관찰의 책 《새 L’Oiseau》(1956) 등을 썼다. 1952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파리에서 추방된 이래, 공직에 관계하지 않고 역사 집필에 전념하였다. 역사에서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중시하고 민중의 입장에서 반동적 세력에 저항하였다.
[14] 페브르(Febvre, Lucien)
현대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페브르는 프랑스 낭시 출생으로 디종대학 ·스트라스부르대학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8년 이후로는 에콜 데 오토제튀드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1929년 M.블로크와 창간한 《사회경제사연보(社會經濟史年報)》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시대를 종합적으로 관찰, 그 배후에서 항상 인간을 발견하려고 한 그의 역사관의 영향은 컸고 경제사에서 사상사에 이르기까지 활동범위도 넓었다. 저서로는 《필립 2세와 프랑슈 콩테》(1911) 《대지(大地)와 인류의 진화》(1922) 《어떤 운명―마르틴 루터》(1928) 《16세기에 있어서의 불신앙의 문제―라블레의 종교》(1942) 《역사를 위한 투쟁》(1953) 《16세기의 마음》(1957) 등이 있다.
[15] 부르크하르트(Burckhardt, Jacob)
부르크하르트는 스위스의 역사가로서 바젤의 신교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신학을 배우다가 역사 ·미술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839년 베를린대학에 들어가, L.랑케에게 역사학을 배웠다. 한편 독일 ·이탈리아의 미술을 연구하여 미술사가(史家)로서도 인정을 받아, 1858년 바젤대학의 사학(史學) ·미술사 교수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인데, 이것으로 그는 랑케가 정치사에서 차지한 것과 같은 위치를 문화사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르네상스사(史)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명저로서, 이후 ‘르네상스’란 말은 역사상 일반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그는 역사 연구의 임무란 ‘발전’이 아니라 ‘항상적(恒常的)인 것, 반복되는 것, 유형적인 것’의 3가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의 손으로 《그리스문화사》(1898∼1902) 《세계사적 재고찰》(1885) 등이 발간되었다.
[16]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로서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 출생.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행방을 감추었다. 불행한 소년시절을 겪은 뒤, 파리의 루이르그랑학원에서 법률을 배우고 1781년 아라스에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다. 1789년 삼부회(三部會) 의원에 당선되고, 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당(黨)에 가입하였다. 의회에서는 소수 민주파에 속해 있었으며 국왕의 거부권에 반대하였다. 1791년 왕 일가가 바렌으로 도망친 것을 계기로 입헌왕정파가 자코뱅당에서 탈퇴하였을 때, 자코뱅당에 남아 그 재건에 힘써 사실상의 당 지도자가 되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일어나려 할 때, 재야(在野)의 몸으로 반대성명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정폐지의 계기가 된 1792년 8월 10일 봉기 후에 급진적인 사건 처리안을 기초하여, 파리코뮌으로부터도 대표로 추대되었다. 그 해 9월 국민공회(혁명의회)에는 파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당통 및 마라와 더불어 산악파(山岳派) 거두로 일컬어졌다. 1793년 6월 2일 산악파가 독재체제를 완성한 후로는 농촌의 봉건제도 불식, 소농민과 소생산자층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의 실현을 서둘러, 공안위원회에 가입하여 공포정치를 추진하였고, 1794년 3월 자코뱅당 좌파인 에베르파(派)를 반란죄의 명목으로 숙청하였다.
이어 4월 우파인 당통파(派)를 일소하여 독재체제를 완성하였으나, 7월 27일 부르주아 공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들의 반격을 받고, 28일 생쥐스트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였으나 그 반면 남에게는 냉담한 인상을 주었다. 일생동안 독신으로 정치에만 열중하여, 루소를 숭배하고, 소(小)부르주아적 혁신을 수행하려다 중도에서 쓰러졌다.
[17] 영방국가(領邦國家, Territorialstaat)
영방국가는 중세 독일의 지방국가의 명칭으로 독일(신성로마) 황제는 교황과의 성직서임권투쟁과 이탈리아 정책에 정력을 소비하여 약체화되었고, 13세기 이후 지방 제후(諸侯)에게 양보를 거듭하여, 왕권에 소속되는 각종의 주권사항을 위양(委讓)하였기 때문에, 지방 제후령은 독립된 주권적 영방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영방국가이며, 13세기 이후 그 수가 약 300이나 되어,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방국가 주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도 각각 영방국가의 하나이다. 이 영방국가가 국가적 분열을 극복하게 된 것은 1871년 독일제국(帝國) 창건에 의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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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16
  • 저작시기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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