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경주답사 레포트-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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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경주답사 레포트-기행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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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것이다. 개구리는 성낸 꼴을 하고 있어 군사의 모습이요,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희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이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결국은 죽는 것이니 그래서 적병을 쉽게 잡을 줄 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야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갸륵한 지혜에 탐복 하였다.
【석빙고】
첨성대에서 산책로를 통해 나가면 석빙고가 나온다. 원래 시원해야하는데 보존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이제는 물방울만 맺혀 있을 뿐이다. 석빙고란,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창고인데, 현재 월성의 북쪽 성벽 중간지점에 성벽을 가로질러 석빙고가 지어져 있다.
신라는 오래전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으며,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있다. 현재 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석빙고는 홍예(虹霓)처럼 된 석재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석(虹霓石)과 홍예석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다 배기공(환기통)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배기공 위를 덮고 있는 석재는 근래의 수리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이다. 높이 1.78m, 너비 2.01m의 출입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어름에서 녹아 내린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석빙고가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築造說) 두가지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위치했다는 견해는 월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고 난 뒤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시 측후소 내에 있는 석빙고 비명(碑銘), 안동의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이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木造)의 빙고(氷庫)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겨 현 위치에 재 축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웅덩이로 남아 있는데, 현재 영조 당시 축조한 석빙고 가운데 경주의 석빙고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신라시대에 축조된 석빙고의 위치 확인과 조선시대의 석빙고와는 구조면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견해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하였을 까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서 신라시대의 것을 개축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안압지】
안압지에 도착한 시간은 7시10분쯤 이였다. 우리는 일회용 카메라를 샀기 때문에 어두워지면 사진이 잘 안나온다. 다음 장에 나오는 사진 또한 안압지인데 흐리다, 그래서 제대로 된 안압지를 첨가한다.
안압지(雁鴨池)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통일신라의 궁터이다. 폐허로 방치되었던 것을 1975년부터 2년간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고 이를 토대로 1980년부터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넓은 평지에 3개의 전각이 있고, 넓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안압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문무왕 14년(674년) 동궁으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궁의 정전 이름은 임해전으로 추정되며, 큰 연못의 이름은 월지(月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폐허가 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거치면서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여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다니는 한가로운 못'이라는 뜻으로 '안압지(雁鴨池)'라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에 발굴하였을 때에는 터만 발견되었기에 이런저런 추정사항만 알 수 있었지 확실한 것은 알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본다. 이 넓은 호수는 전부 인공호수인데 발굴 당시 많은 유물이 나와서 이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따로 안압지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전체 호숫가를 한바퀴 돌아보면서 호숫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모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는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한 느낌을 받게 하려는 건설과정에서의 의도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는 3개의 건물들이 발굴 이후에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참고하여 지어져 있지만 그 이외에도 그 때의 왕궁들의 터들이 넓게 남아있고 그 당시 추정 건축물들의 모형이 남아있기에 화려했던 당시의 안압지 터를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다.
다녀와서...
우리는 거의 7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여러 유적지를 돌아 다녔다. . 비록 경주를 다 볼 수도 없었고, 또한 다 알 수도 없었지만 답사를 마치고 레포트을 쓰면서 별다른 자료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장면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것을 보면, 사전에 준비해간 자료집의 덕분임을 실감케 된다.
경주는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익숙한 곳이다. 수학여행을 통하여 누구나 한번쯤은 다녀왔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름난 몇몇 유적들을 돌아보는데 그치거나, "경주=관광지" 이런 식의 인상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사 개론' 시간을 통해서 관광지가 아닌 '역사와 문화의 학습의 장', '신라인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으로 경주를 답사 할 수 있게 되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즐거움과 동시에 무언가를 새롭게 느끼고 배우는 지적 충만을 하였고 경주는 신라 역사 1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유적이 산재해 있고, 탁월한 예술작품을 구석구석에서 감상할 수 있는 흔지 않은 곳이다. 이번 계기로 인해서 사료는 과거 사실들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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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30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9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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