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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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4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 서론

Ⅱ .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생애
1. 보니파키우스 8세의 생애
2. 필립 4세의 생애

Ⅲ . 프랑스의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의 전쟁

Ⅳ .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분쟁
1 . 첫 번째 분쟁
2 . 두 번째 분쟁
3 . 체포당한 보니파키우스 8세

Ⅴ . 아비뇽 유수시대(1309∼1377)

Ⅵ . 필립 4세의 유대인과 성전기사단에 대한 박해

Ⅶ . 결론

본문내용

승인하였다. 프랑스 왕의 정책·지배하에 있으면서 교회의 요직에 프랑스 사람을 많이 임명하여 교황권의 세계적 성격은 그의 치세에 크게 후퇴하였다.
에게 시험삼아 제의한 건의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필립은 노가레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고해 신부(이 사람은 프랑스 주재 교황청의 종교 재판관이기도 했음)의 지지를 얻어, 1307년 9월에 프랑스의 성전기사단원을 모두 체포하고 동료 통치자들에게도 자기를 본받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성전기사단에 대한 고발에 의심을 풀고 망설이던 클레멘스 5세도 결국 필립을 지지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립 4세의 신하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성전기사단을 맹렬히 비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성전기사단 대표들의 입에서 직접 파멸적인 고백을 들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심한 고문을 받은 상태였다. 광범위한 분야의 사람들로 구성된 법정은 성전기사단원들의 헌신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모았고, 기사단은 이단으로 유죄 선고를 받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그 재산은 구호기사단에 귀속되었다.
필립 4세가 성전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행동은 성전기사단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클레멘스 5세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립 4세에게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전쟁을 멈추고 있는 동안 필립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 및 황제들과의 교류에서 프랑스의 독립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아들들의 결혼을 이용해 프랑스의 영향력을 부르고뉴 지방까지 확대하고 리옹에 대해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동부 국경을 강화했다. 그러나 제국에 대한 지배권은 결국 얻지 못했다. 이 야심은 동생이나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1308년에는 동생 샤를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게 하는 데 실패했고, 1313년에는 둘째 아들 필립을 밀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Ⅶ. 결론
13세기에서 14세기 초에 걸친 시기는 교황권과 왕권 사이의 대립이 격렬하게 이루어진 시기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이 시기에 이루어진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로 대변되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양상을 알아보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교·속권의 대립결과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시대라는 교황권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과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이 대립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왕정을 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럼 "왜 교권과 속권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까?"하는 문제를 제기해보면, 이 문제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재위 배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권의 강성과 황제권의 강화 즉, 왕정의 확립은 동시대에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체제였고, 양 세력이 당시 최고절정기였기에 서로의 마찰 혹은 갈등을 표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보여지며, 중세시대라는 기간동안 계속적으로 잠재되어온 교권과 속권 사이의 은밀한 긴장관계가 극에 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겔라시우스의 '두 칼의 이론(Theory of two swords)'에서처럼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타원의 두 중심, 즉 교권과 속권이 조화로운 협업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더라면 교·속권 간의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적 배경과 양 세력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겔라시우스의 이론은 대립, 갈등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교권·속권의 두 주인공에 대하여, 지금 우리는 필립 4세의 왕정확립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만을 중요시하고, 그의 이면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보니파키우스 8세의 교황권 강화를 위한 노력과 그의 연구는 도외시 한 채 교황권 쇠퇴에 따른 결과론적 비판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 참고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유럽의 형성과 발전, 집문당,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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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타이어니, 박은구 외 옮김, 《서양중세사 연구》, 탐구당, 1988.
프레데릭 들루슈, 윤승준 역, 《새유럽의 역사》, 까치, 1995.
http://100.lycos.co.kr/
http://www.encyb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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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11.2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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