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낳은 여성문학인 정령(丁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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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혁명이 낳은 여성문학인 정령(丁玲)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정령의 생애

2. 정령의 문예활동
1)사회주의 충실한 혁명 전사로
2)<<태양은 상건하를 비추네>>와 중국 토지혁명
3)그 외의 작품들과 작품 세계관

3.공산화로 한축이 완전히 붕괴된 중국문학
▷정령과 그 외 작가들의 암흑기◁

본문내용

의지와 완강한 의력을 표현하였다. 고난에 처한 인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운명이 하늘이 준 재해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압박하고 기편하는 관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한 백성들에게 주는 관청의 재난이 더 주요 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동심협력하여 홍수보다 더 흉맹한 기세로 대오를 지어 도시에 달려가 관청과 투쟁하려 한다. 작품에서 보여준 선명한 혁명적 주제와 새로운 표현형식은 당시에 적극적인 영향을 일으켰다. 때문에 모순은 《여작가 정령》이란 글에서 소설 《물》의 발표는 정령 개인이거나 당시 문단을 놓고 말하면 모두 과거의 혁명과 연애의 공식이 이미 청산되었다는 것을 표시한다고 말하였다. 《전가충》은 한 고농가정에서 지주가정 출신의 여공산당원을 접대하는 과정을 통하여 농촌에서의 공산당의 활동을 표현하였고 혁명자들이 군중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헌신정신을 노래하였다.
정령은 그 후 계속 《소식》, 《법망》, 《어느 날 저녁》등 소설을 써내었는데 주로 현실 노동인민의 생활투쟁을 내용으로 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사이에 정령은 장편소설 어머니》의 창작에 몰두하였다. 작자는 청나라 말기로부터 신해혁명, 1927년 대혁명, 30년대 초기의 토지혁명까지 쓰려 계획하였다. 소설은 호남의 한 소도시와 몇몇 향진을 배경으로, 몇몇 지주가정을 중심으로 전세대의 여성들이 어떻게 봉건사회 제도의 천신만고 가운데서 생활하여 왔는가를 표현하였다. 《어머니》는 3부작 가운데의 제1부였다. 그러나 신해혁명 전후까지 밖에 쓰지 못한 미완성작으로 되었다.
정령이 섬북에 이르러 혁명실제사업에 참가한 이후 사상과 창작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소설집 《채나가지 않은 탄환 한알》과 내가 하촌에 있을 때》 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전투의 세례를 받은 노동군중과 혁명전사의 형상을 그려내었다. 소설 《채 나가지 않은 탄환 한알》 가운데 행군에서 대오를 떨어진 어린 홍군전사는 군중의 애호를 받았다. 그는 명령을 받들고 포위토벌하려 온 백비군 앞에서 두려움 모르는 혁명기개를 표현하였으며 다라서 백비군련장의 애국정의감을 격발시킨다. 련장은 차마 이 용감한 소년을 살해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재운 탄환을 끝내 쏘지 못한다. 소설 《내가 하촌에 있을 때》에서는 전선부근 한 촌락의 정정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이 일본침략자에게 붙잡혀 갖은 모욕을 다 받았으나 여전히 항일군대에 정보를 보낸 이야기를 썼다. 소설은 인물의 자! 술과 측면소개의 형식으로 모욕당하고 손해받은 그러나 마음씨가 순결한 청년여성의 형상을 부각하였다. 단편소설 《병원에서》는 한 젊은 여의사 육평의 신건된 병원에서의 한단락 경력을 통하여 현대과학 기술지식과 낙후한 관리사업 간의 모순을 진실하고 심각하게 제시하였다. 이로부터 작자는 혁명근거지 문학가운데서 처음으로 소생산자 사상의 침습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출하였다. 소설은 비록 적극적 역량에 대한 표현이 부족하고 정확한 방향을 제시한 혁명로전사의 출현이 늦으며 촉망하게 끝맺은 결함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사회의의를 가진 작품이다.
3.공산화로 한축이 완전히 붕괴된 중국문학
정령과 그 외 작가들의 암흑기
1949년 10월 중국 공산화는 기존에 사회주의 문학과 자유주의 문학으로 대별되던 문학의 공산화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일단 중국 문학은 완전히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1942 년 이전에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한 궈뭐뤄(郭沫若), 예성타오(葉聖陶), 마오둔(茅盾) 등 노작가는 물론이고 아이칭(艾靑), 차오위(曹 ) 등 대부분의 작가의 창작활동은 거의 중지됐다. 물론 50년대 반동작가로 낙인된 중국 현대 사상의 거장이자 문인 후스(胡適),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林語堂), 루쉰의 지인으로 유명한 저우줘런(周作人) 등의 창작활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당대문학사'의 저자 훙즈청(洪子誠)은 "많은 작가들의 예술 생명은 50년대 이후 사실상 끝이 났다"며 그 근거로 마오쩌둥의 문학관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배척된 것, 자기의 문학관과 생활의 체험, 예술형식이 현실의 문학 규범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점, 5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정치와 문학의 비판운동 가운데 직접적으로 화를 입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이들 작가의 운명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문혁의 시작점인 1966년 베이징의 타이핑후(太平湖)에서 시체로 발견된 라오서(老舍)같은 비극적인 인물도 있다. 뤄투오샹쯔(駱駝祥子)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가 조국이 통일된 것을 보고 온 후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도 받았지만 문혁의 초반기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죽은 그의 운명은 사실상 문혁을 거친 노작가나 순수 창작가들 대부분에게 시련이었다.
「정령은 문혁의 초기에 그 풍파에서 벗어나 안전하다가 1970년 베이징으로 비밀리에 압송되어 수감된다. 그랬다가 75년에는 다시 산시성 창즈(長治) 보내진다. 76년 문혁이 마무리되고 그녀도 누명을 벗는다. 그리고 79년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지고, 84년 8월에는 중앙서기처가 '딩링 동지의 명예 회복에 대한 통보'를 발표해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거의 지쳐 있었고, 85년 7월 입원한다. 그녀는 병원에서 문학격월간지 '중국'의 일을 계속 보는 등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다가 86년 3월 4일 영면한다.
그녀의 삶, 혹은 그 시대를 관류했던 문인들의 삶을 문학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다르고, 시대도 다른 이들이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 또 문학의 순수와 참여를 놓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하는 논의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연이 되어 문학좌담회의 장소가 된 샨시성의 도시 옌안의 한켠에 자리한 양지아링(楊家嶺)을 두 번이나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회의 장 앞에는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마오쩌둥과 정령을 포함한 중국 사회주의문학 초기 작가들의 기념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 하나 가슴 아팠던 것은 아무런 보장을 할 수 없었던 그 당시 꿈꾸던 사회주의 문학의 초발심을 누군가부터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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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21
  • 저작시기2004.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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