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의 한국 민주주의 - “냉전 반공주의와 조숙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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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해방공간과 국가형성과정
1.전후의 세계질서와 분단
2.미군정과 국내의 정치적 상황

[2] 한국전쟁의 영향과 의미
1.원인
2.한국 전쟁의 영향과 의미

[3] 한국과 일본의 정치 체제 비교
1. 한국의 ‘세자리즘’
2. 일본의 ‘55년체제’

[4] 해방 이후~1950년대 정치체제 전반의 특징
1.보통 선거권
2.정당
3.냉전 반공주의와 민주주의

본문내용

금액 이상의 납세자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하는 체제. 보통 선거권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한된 선거권 체제는 대표의 확대를 요구하는 이른바 차티스트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단계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처음에는 성인 남성인구 중 일정수준 이상의 재산세를 납부할 수 있는 재산 소유자로부터 시작하여, 중산층, 상층 노동자, 성인 남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성 유권자로 확대되면서, 결국 성인 남녀 모두에게 확대되는 과정을 거쳤다. 보통 선거권제의 도입 시기로 볼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에 비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을 때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조직되었고, 1차 대전 직후인 1920~30년대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집권 정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투표권 확대와 더불어 정당의 구조가 소수 엘리트 중심에서 대중정당으로 급격하게 전환한 결과였다. 요컨대 서구에서의 투표권 확대 과정은 광범위한 사회집단과 계급의 정치적 참여의 확대를 동반했다.
한국에서는 보통선거권이 1948년 5.10 선거를 기하여 일거에 "부여"되었지만, 제도를 제외하고는 서구에서와 같은 변화는 없었다. 정당체제가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사회의 계층구조와 기능적 이익을 반영한 것도 아니었고, 대중정당으로 발전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 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율은 95%를 상회했지만, 일반 투표자들의 자발적 참여의 결과라기 보다는 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동원된 매우 수동적인 정치참여의 의미가 컸다.
2. 정당
강력한 관료 국가 체제는 허약한 대의 제도에 기반을 둔 것이며 허약한 대의 제도의 특징은 곧 이념적으로 협애한,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정당체제를 핵심내용으로 한다. 해방 공간에서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
) 1946년 2월 8일 민족주의 정당들이 조직한 정치 단체. 반탁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 좌익 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적 단체였다.
그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 세력(뒤의 한독당), 김규식의 중간파 및 민족자주연맹
) 1947년 12월 20일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도했던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된 후 중간 정치 세력의 집결체로서 만들어진 조직. 김규식은 여운형 암살 후 민중동맹 신진당 사회민주당 등 중간파 세력을 규합하여, 좌우익 편향을 배제하고 민족의 자주 노선을 표방하며 이 단체를 결성했다.
,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세력(뒤의 인민당, 근로 인민당),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당. 해방 후 박헌영에 의해 재건되었다. 남쪽의 공산주의 세력을 규합할 목적으로 1946년 11월에 남조선신민당 및 조선인민당과 함께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통합되었다.
(뒤의 남로당) 등이 있었다.
) 발표문 2쪽의 표 참고
박헌영은 북한으로 갔고, 남북한이 이념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세력 혹은 사회주의 세력이 배제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분단국가 수립 과정에서 김구, 김규식과 같은 온건좌파그룹 역시 분단에 반대하면서 스스로 참여하지 않았거나 배제되었다.
여러 정치 세력 중에서 이승만 그룹과 한민당 만이 분단국가를 제도화하는 선거경쟁에 참여했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광범위한 비극우 잔존세력들은 대부분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멸되었고, 그 결과 자유당 대 한민당의 양당제적 틀을 갖추게 되었다.
) 예외가 있다면 1950년 대 중반 조봉암의 진보당이 있다. 1958년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간부들이 간첩과 내통하고 북한의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이 "진보당 사건"이다. 조봉암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되었고, 혁신세력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두 그룹만이 정당 체제를 주조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정당체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첫째, 여야당은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 위에서 경쟁한다. 둘째, 양당은 밑으로부터 대중적 이익이나 요구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지도자와 이를 둘러 싼 엘리트 중심적 성격이 강하다. 셋째, 여야당을 막론하고 사회전체, 국가 전체, 민족 전체의 대의와 이익을 내세움으로써 포괄정당적 성격을 갖는다.
3.냉전 반공주의와 민주주의
냉전이 만들어낸 정치 구조는 민주주의 발전에 두 가지 부정적 효과를 갖는다. 하나는 이념적 분화의 양극효과에 의한 광범위한 중앙영역의 부정이다. 그 효과는 정치적 갈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양극분화하고 정치경쟁의 양상을 극한적인 적대관계로 몰아갈 뿐만 아니라, 반대 세력과 비판자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냉전 반공주의를 헤게모니로 한 정치경쟁의 지형은,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는 정치경쟁을 불가능하게 하고 협애한 흑백논리적 양자택일로 정치를 축소시켰다.
냉전 반공주의의 또 다른 부정적 효과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현실에서 정치적 언어와 담론이 존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일상적인 정치용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쉽게 채색될 때 인민, 민중, 계급 등의 말들은 이내 일체 좌파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합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이념적 불러내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언어와 담론이 존재하지 못하는 곳에서 정치의 실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냉전 반공주의적 조건에서는 이념과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나타나기 어렵다. 이승만과 한민당같이 보수적인 이념적 지향을 갖는 여야당을 제외하고는 제3의 다른 종류의 정당은 유지될 수 없었다. 설령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경우에도 빨갱이 또는 친북세력으로 정의하는 순간 쉽게 이들을 배제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티스 2002
박현채 엮음,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소나무,1992
두산동아출판사편집부,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 두산동아, 2001
동경대일본사연구실, 『일본사개설』, 지영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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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28
  • 저작시기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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