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과 허균의 문학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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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허균과 허균의 문학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허균에 대하여
- 그의 생애 요약을 중심으로

2. 허균과 그의 문학에 대하여

3. 허균이 생각하는 문학
1) 시 - 시 정신이 중요하다.
2) 문장 - 저항의 표현
3) 소설 - 민중작가의 위치
○ <홍길동전>에 나타난 주제

4. 허균의 한문 소설 다섯 편에 관하여 - 참고

본문내용

는 중앙의 벼슬아치보다는 지방의 수령들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탐관오리는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의 요소로 등장하였다. 조선조 초기에는 중앙의 권력층보다 지방의 수령들이 탐관오리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목민관이라고도 불리는 수령은 왕권을 대리하는 지방관인데 이들을 뽑을 때에는 재능보다 덕을 더 높이 쳤다. 이것은 왕권을 대행하는 과정에서 생기기 쉬운 부패를 방지하려는 장치였을 것이다. 또 수령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칠사(七事)'
일곱 가지 해야 할 일이다. 첫째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고 둘째 호구를 늘리고, 셋째, 학 교를 일으키고, 넷째 군정을 잘 닦고, 다섯째 부역을 고르게 하고, 여섯째 소송을 간소 화하고, 일곱째 농간을 없앤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온다.
의 실적을 살펴보았다. 이들 수령들은 이런 제도 장치가 있었음에도 중앙의 권력층과 결탁하고 지방의 토호나 향리들과 손잡아 갖가지 민폐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홍길동은 그들을 응징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응징하여 빼앗은 재물은 곧 본디의 주인들인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첫 번째 대상은 해인사였다. 해인사는 본산 사찰의 하나로 수만 석의 도조를 거두어들이는 지주였다. 본디 큰 절들은 원납한 신도들의 토지를 포함하여 승려 몇 천명이 먹고 생활하는 데에 쓰거나 재를 올리는 데에 드는 경비를 염출키 위해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본산 사찰은 농민들에게 토호로 군림해 왔고, 그만큼 원성도 높았다. 홍길동이 해인사를 먼저 턴 것은 배불정책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전체의 분위기로 보아 토호세력을 응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허균 자신도 불교에 심취해 있으면서 훌륭한 중과 교류를 깊게 하였다. 해인사를 턴 것은 배불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해인사 다음으로 터는 것이 함경도 감사이다.
감사는 수령 중에서 가장 윗자리로 탐관이 되어 치부할 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다. 함경도는 서울과 거리가 멀고 또 감시 역할을 하는 향반의 세력도 적으며 토산품이 풍부한 곳이다. 바로 이런 곳을 홍길동이 재물을 터는 주요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때의 독자들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홍길동은 그 밖에도 팔도를 두루 다니며 부정축재자의 재물을 턴다. 이것은 탐관오리의 숙청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는 뜻에서 재물을 터는 것인 만큼 정당한 재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 모순의 제거로 볼 수가 있고 사회개혁의 한 표현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다. 홍길동이 정당한 재물이나 관가의 재산을 빼앗지 않은 것은 불의와 정의를 구별하고 국가나 사회의 기본 질서는 파괴하지 않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길동전>은 사회소설로서 강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서얼 차별의 철폐, 빈민의 구휼, 탐관오리의 응징이 개혁 또는 혁명으로 한 줄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용을 지닌 <홍길동전>은 정치관과 학문관에서 보여준 그의 사상을 민중과 더욱 더 가깝게 하여 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4. 허균의 한문 소설 다섯 편에 관하여 - 참고
그의 한문소설은 다섯 편이 전해진다.
<성소부부고> 여덟 권째의 '전(傳)'에 있다. '전'이란 문체는 실제 인물의 행적을 쓴
전기체와 허구의 내용을 담은 소설체의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곧,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남궁 선생전>,<장생전> 이다. 이 소설들을 쓴 때는 그가 공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잠깐 동안 부안에 살았던 1608년 이후로 짐작된다. 그는 그의 문집을 만들 때에 이들을 문집 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들이 <홍길동전>에 앞서 쓰여졌다는 것을 김무헌은 <강릉교대 논문집> 속의 허균의 <한문소설연구>란 논문이세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광해군 4년에 <홍길동전>을 썼다고 하니 한학자로서 한글소설보다는 한물소설을 먼저 썼을 것이며, 이미 매월당의 <금오신화>도 있고 보면 이것을 믿어도 좋다. 한문소설이 그의 한글소설의 모태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이 천한 기생의 소생이라는 점, <장생전>에서 장생이 거지를 구제한 활빈과 동해로 이상국을 찾아간 점을 들 수 있으며, 유, 불, 선에 재래적 무속까지 곁들여진 작품들인 공통점에서......... 이 작품이 그가 스스로 편집한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으며 다행히 그의 문집이 광해군 3년에 된 것이기에 <홍길동전>보다 한 해 앞인, 교산이 마흔세살 되던 해로 함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1611년(광해군 3년)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정한 저작 시기는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겠다. 다만 <남궁 선생전>에서 "균(자신을 가리킴)이 공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부안에 살 적에 선생이 고부로부터 나를 찾아와서 사경의 깊은 비결을 나에게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한문소설은 부안에 살고 난 뒤에 지은 것으로 보이나 세 차례나 부안에서 살았으므로 1611년으로 추정될 근거는 없다고 하겠다. <홍길동전>이 1612년에 쓰여졌다고 전제할 때에 <홍길동전>보다 먼저 쓰여진 것만은 확실하다.
참고문헌 -----------------------------------------------------
1. 김은정,「홍길동전의 구조적 특성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1990.
2. 박미선,「홍길동전에 반영된 작가정신」, 동국대학교대학원, 1998.
3. 이유경,「홍길동전 연구」, 성신여자대학교대학원, 1999.
4. 유교반도 허균: 허균의 사상과 문학 이가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5. 허균: 자존의식과 이상향 추구 김현룡 건국대학교출판부 1995
6. 홍길동전 연구: 서지와 해석 이윤석 계명대학교출판부 1997
7. 하층 영웅소설의 역사적 성격 신태수 아세아문화사 1995
8. 홍길동전 허균 학원출판공사 1999
9. 고전소설 작품세계의 실상 이원수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6
10. 이이화. 허균의 생각. 뿌리깊은나무. 1980.
11. 조종업의 <장암 지헌영 선생 화갑기념논총> 속의 <허균 시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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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8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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