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희곡론] 조광화 읽기 -『남자충동』을 중심으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내 속의 알 파치노를 만나다. - complex의 일치
Ⅱ. 이야기 속으로 - 暴力衝動과 조작된 神話
Ⅲ. 무대 둘러보기 - 演劇적 재미와 主題意識, 【공연성과 예술성】
Ⅳ. 사회적 기능 - 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디, 그기 <남자충동>으 이장정이여 ?
Ⅴ. 조광화와 헤어지기 - 글을 준비하고 마치며...

본문내용

있다. 그들이 휘두르는 주먹과 칼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폭력이 미화되는 경향이 연극 <남자충동>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 테러범들이 시뮬레이션 전자 게임을 보며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는 계획을 구상했다거나, 영화 <친구>를 보고 고등학교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것들이 폭력충동을 부추기고 있을 뿐 전혀 고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허리우드의 『007』시리즈나 『람보』류의 영화들은 제작자들의 견해처럼 악을 소탕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신화'의 도식을 강화하는 데에만 기여할 뿐인 경우가 다반사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역기능의 발생 가능성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예술은 그 어떤 선동 구호보다 더욱 강렬하고 은밀하게 개인의 내면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본원적 기능이 그러한 것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예술은 美의 창조를 그 궁극의 목적으로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연극이 계몽의 수단일 필요나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정신을 붙들어 맬 뿐이다. 적어도 예술 안에서는 거칠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인간정신의 마지막 아웃토반이다. 藝術이 무엇인지, 美란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조광화는 <悲劇精神의 復活>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 선악은 없다. 미추는 있다. 악은 불쾌함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다. 관객들은, 미학적 묘사에 성공한다면, 무대의 인물이 아무리 악마일지라도 매료당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
예술이 美를 창조하는 것에 그 존재목적을 둔다고 할 때, 위의 발언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美는 生의 표현이며, 콤플렉스의 교통이다. 예술인들은 자신의 몸을 강타한 生의 진짜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할뿐이다. 그것이 진실되다면, 그 자체로 선악이나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연극 역시 관객들의 인식을 계도할 의무는 없으며 또한,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물론,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이 좀 더 호소력이 있어서 자신이 그렸던 세상이 실현된다면 좋겠지만, 예술은 그것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된다면 또 하나의 신화를 조작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술은 진실을 말할 뿐이므로, 그 진실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후차적인 문제가 된다. 연극 <남자충동>이 폭력의 진실을 말했다고 할 때, 그것은 거부될 수도 있고, 모방될 수도 있다. 관객들은 자신의 세계 속으로 주어진 텍스트를 통과시킨다. 통과된 텍스트가 진실하다면 인간 원형에 들어붙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떠내려 갈 것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는 진실이 어떻게 말해졌느냐 하는 점에 있다. 연극 <남자충동>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콤플렉스를 예민하게 짚어내고 있다. 또한, 거부와 모방은 관객의 문제로 넘어가므로, 연극 <남자충동>의 고발기능에 대한 비판은 논외가 될 것이다. 다음은 필자가 조광화에게 딴지를 걸고 얻은 대답
) cafe.daum.net/∼kwanghwa
이다.
『 나는 <친구>를 보고 참 잘 만든 영화라 생각했지만 한편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친구>를 수십 번 보고 같은 방식으로 반 아이를 살해했습니다. 나는 그 찬미를 거부했고, 학생은 모방했습니다. 주변에는 폭력이 난무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본 세상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폭력이 멋져 보여서, 어떤 사람은 멋진 폭력의 이면에 숨은 허위가 보여서... 그러나 그것을 보고 공감하거나 거부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관객의 몫입니다. (연극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연극이 계몽주의의 수단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 (괄호 안 필자첨부)
Ⅴ. 조광화와 헤어지기 - 글을 준비하고 마치며...
<남자충동>은 나의 귀와 머리, 그리고 가슴을 끈덕지게 붙잡은 연극이었다. 비록 공연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생생한 장면이 연상될 정도였다. 조광화가 보여준 여러 연극적 장치들과 문학적 상징들은 연극장르에 대한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첫술밥이었다. 조광화씨의 새로운 연극 <生存都市>가 공연되는 날을 기다리며, 청담동 유씨어터에 텐트를 펼 생각이다. 공연성과 예술성, 조광화씨가 그것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즐거워하면서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내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키워드

  • 가격1,2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11.17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378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