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 「꽃게무덤」과 김훈의 「화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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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권지예 「꽃게무덤」과 김훈의 「화장」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권지예의 꽃게무덤
1. 꽃게 무덤의 줄거리
2. 소설 속에 드러나는 색채적이미지
3. 찐 게와 산 게, 게에 대한 집착
4. 반야심경의 의미
5. 꽃게, 밀물 썰물, 그리고 달
6. 피들러 꽃게와 나
7. 석모도
8. 다시 외포리 포구

■ 김훈의 ‘화장’ 죽음의 재탄생
1. 육체의 양면
2. 현실 속에서의 죽음
3. 내면여행 그리고 가벼움.
4. 죽음의 이면과 재탄생
5. 추은주의 떠남과 보리
6. 꽃게 무덤과 화장

본문내용

진단했던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다.
종양은 생명 속에서만 발생하는 또다른 생명이다. 죽은 조직안에서 종양은 발생하지 않는다 종양의 발생과 팽창은 생명현상이다. 생명 안에서 생명을 부정하는 신생물이 발생하고 서짓하면서 영역을 넓혀나간다. 이 현상은 생명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종양과 생명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의사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고 의사의 말이 ‘비어있다’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의 말은 ‘죽은 자는 종양에 걸리지 않고, 살아 있는 자만이 종양에 걸리는 것인데 종양 또한 삶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도 저도 아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죽은 조직 안에서 조직은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죽은 조직 안에서 아기도 생길 수 없다. 종양이든 아기이든 이 두 가지는 살아있는 조직체 안에서 생긴다. 죽은 자에게서는 종양이든 아기이든 생길 수가 없다. 즉 아내에게 생긴 종양은 어떻게 보면 살아있음의 역설이다.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내는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실감나게 경험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살아있음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아기는 몸에서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생명이 되지만 종양은 그 몸에서 태어나고 그 몸과 함께 죽음으로 간다. 이 두 가지의 죽음에 가치와 우위를 우리는 판가름 할 수 없다. 새로운 생명체를 타생시키고 임종을 맞이하든 종양과 함께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든 그것은 엄연한 한 인간의 죽음에 문제이다.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느끼는 죽음과 동떨어진 관점일 수도 있으나 아기이든 종양이든 이 두 가지는 삶의 반증이다. 그렇게 아내의 죽음이든 우리의 죽음이든 죽음자체에서 끝날 수는 없다. 죽음이 아무리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라 해도 인간들은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 희망을 찾고자한다. 살벌하고 끔직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는 이 소설은 죽음이 죽음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다른 비약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리로 인도하고 죽음을 재탄생,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감동 깊게 해석한다. 그러한 작가의 사상과 언어의 주술력이 잘 맞물린 이 소설은 하나의 희망을 보여준다. 즉 죽음을 맞이한 육신이 썩고 냄새나는 땅으로의 귀결이 아니라 불로 깔끔하게 태워지고 뽀얀 뼈가 분쇄되어 공중으로 뿌려지며 하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아직도 인간에게는 미지의 곳인 하늘, 혹은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5. 추은주의 떠남과 보리
한 사람의 인생에서 건강하고 신선했던 육체를 가지고 있던 시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점은 그 육체가 영원하지 못하며 또한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나타난 새로운 생명성, 완연한 육체를 가진 여자가 바로 추은주이다. 추은주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는 이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추은주라는 인물은 나의 마음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만약 나와 추은주의 관계가 내가 추은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을 한 사람이었거나, 추은주가 나의 마음을 눈치 챌 수 있음 만큼의 행동을 했다면 그래서 둘 사이가 세속적인 불륜관계로 넘어 섰다면 이 소설은 다분히 통속적이고 음험한 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은주는 모르는 상태에서 이름만 부르며 그녀를 생각하고 상상하는 내 속에는 육체적인 관음의 차원은 아닌 것이다.
아내의 화장을 마치고 난 뒤 추은주의 출국소식을 듣는 나는 무감각하게 결제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몇 년을 이름만 불렀던 ‘내 속의 여자’로서의 무게는 그쯤에서 끝나버린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추은주도 내 속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이런 점이 내가 아내를 병실에 두거나, 화장터에서 추은주의 생각을 지배적으로 했어도 그 명분이 있는 것이다. 추은주는 내 속의 생명성으로 깃들어 있던 것이다. 아내가 죽고 난후 추은주도 떠나갔듯이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추은주도 옆에 있었다. 즉 아내가 상징하고 보여주는 죽음과 쇠퇴와 추은주가 상징하는 생명과 완연함은 항상 동시에 공존한다는 말이다. 생명과 죽음이 동떨어 질 수 없듯이 암과 신선한 세포, 또한 추은주와 아내는 함께 항상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것이다.
작가는 죽음이 죽음에서 끝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어떤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무겁고 어둡게 우리들 주변에 맴돌다가 엄습하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빛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그 빛을 대신하는 것은 ‘보리’라고 할 수 있다. 보리라는 것은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인 불타 정각의 지혜를 뜻한다. 그 지혜라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에게서 벗어난 해탈, 다시 새롭게 태어남, 윤회사상을 표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전에 아내가 아꼈던 개는 어찌보면 아내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아내의 죽음 옆에서 어떤 일말의 희망을 대신하는 죽음의 이면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현실에서 죽음이 주는 무겁고 두려운 일면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으며 또한 그 죽음에서 머무르지 않고 작가 특유의 사상과 상징으로 그 즉음을 한결 지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죽음을 다시 한번 심도 있게 생각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과 구성력에 감동할 수 있었다.
6. 꽃게 무덤과 화장
꽃게 무덤과 화장은 삶에 대한 동일한 인식체계를 갖고 소설쓰기에 임하고 있다. 권지예의 꽃게무덤에서 나타나는 꽃게, 달, 바다 등등이 상징하는 삶의 끊임없는 반복과 회귀를 역설하고 있다면 화장 또한 죽음의 아내와 생명의 추은주, 내면여행과 가볍다, 보리를 통해 죽음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생성되고 반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서 우리의 삶도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키워드

권지예,   김훈,   화장,   꽃게무덤,   육체,   현실,   내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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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4.14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2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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