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의 이해(중국인물조사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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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송미령(宋美齡)

2. 쑨원[ 孫文(손문), 1866.11.12~1925.3.12 ]

3. 모택동(毛澤東)

4. 장제스[ 蔣介石(장개석), 1887.10.31~1975.4.5 ]

5. 송경령(宋慶齡)

본문내용

의 요원과 화교들을 살해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15일 저녁 진형명의 부대는 이미 총통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6월 16일 새벽 2시에 손문은 진형명의 부대가 그의 집을 공격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때 송경령은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손문은 그녀를 깨워서 함께 이곳을 떠나 위험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송경령은 대세를 살핀 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손문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반란군에게 발각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자신은 남아서 손문의 비밀 철수를 엄호하기로 결심하고 손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중국은 나는 없어도 되지만 당신은 없으면 안됩니다.!"
손문은 물론 호위병들도 모두 송경령에게 빨리 철수하라고 재촉하였지만 누구도 그녀의 결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손문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남겨둔채 혼자서 먼저 떠나기로 하였다. 손문은 50명의 호위병들을 모두 집에 남아 있게 하고 자기 몸만 빠져나갔다. 손문은 간신히 반란군의 시야를 피하여 황포 영풍함(永豊艦)에 도착하였다. 손문은 안전하게 영풍함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포성을 세 번 울렸고, 집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송경령과 호위병들은 밤중에 울려퍼진 그 포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손문이 떠난 지 30분 쯤 지났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포성이 울려퍼졌다. 반란군이 송경령이 남아 있던 월수루(손문과 송경령이 살던 집)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란군은 "손문을 죽여라! 손문을 죽여라!"고 외쳐대면서 좌우에서 협공을 해왔다. 반란군의 공격을 받은 호위병들은 8여시간 동안 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총격이 멎자 그때까지 부근의 야산에 피신해 있던 송경령은 요대장(姚隊長)과 두 명의 호위병과 함께 산을 내려와서 육교를 따라 기어갔다. 이때 유탄이 공중으로 날아와서 송경령의 귀밑머리 부위를 두 발이나 스쳐지나갔다.
그들이 막 육교를 지나갔을 때 육교는 반란군의 포격을 맞고 무너졌으며 요대장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두 명의 호위병은 그를 들고 총통부 후원으로 들어가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총통부에 이르렀을 때 주위의 포성은 멎었다.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송경령과 호위병들은 포탄이 끊이지 않는 생지옥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날 오후 4시에 광주 위술구(衛戌區) 사령 위방평(魏邦平)이 총통부로 부관을 보내어 조건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첫째가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그 부관은 송경령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때 2층 철문이 열리면서 반란군이 진입하였다. 이 혼란 속에서 송경령은 대문을 뚫고 나가 기지를 발휘하여 손에 싸 들고 있던 물건을 땅에 던졌다. 그녀는 반란군들이 그 돈주머니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사이에 그속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때 송경령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던 중이라 행동이 몹시 불편했다. 대문을 뚫고 나온 후에 송경령은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하여 반란군들을 따돌리고 간신히 사면(沙面)의 친구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후 다시 기선을 타고 영남대학(嶺南大學: 지금의 중산대학 中山大學) 총장 종영광(鍾榮光)의 집으로 갔다. 오랫동안 피로와 긴장에 시달린 탓에 송경령은 종광영의 집에서 유산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그녀의 일생동안 유일한 임신이었다.
이후 송경령은 안전하게 황포도로 가서 영풍함에 승선하였다. 그녀는 "내가 영풍함에서 손문을 만났을 때 사별한 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이 사건에서 송경령이 보여준 용감한 행동으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국민당 중에서 그녀와 손문의 결혼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당원들도 송경령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되었다.
진형명의 반란으로 송경령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유산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녀는 평생동안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여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치유하기 어려운 육체적 정신적 상처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더 넓은 가슴으로 더 많은 사랑을 사랑하면서 무수한 아동들을 위해 더 고귀한 모성애를 발휘하였으니 진정 위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경령의 미용 비법
송경령은 빼어난 용모를 지닌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젊은 시절의 미모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중국에서 자연미를 갖춘 미인의 표준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사진에 나타난 그녀의 인상은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모습에서 내면의 평온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최대의 미용 비법은 바로 이 "평온함"이다. 이러한 평온함은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녀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면의 평온함은 그녀가 간직한 미의 원천이며 그것이 밖으로 표출 된 것이 바로 그녀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편협적이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포용적이고 사심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내면의 평온함으로써 자기의 민족과 대중을 열렬히 사랑하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내면의 평온함을 간직하기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여러 가지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면의 평온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내면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생활 속에서 참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 번은 한 친구가 그녀에게 최대의 미용 비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때 그녀는 친구에게, "복잡한 바깥 세상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평온하고 온화하게 대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아름다운 내면 세계를 간직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녀의 "비법"은 바로 자기자신의 내면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평온함을 간직하는 것이 그 어떤 화장품 보다도 좋다. 그것은 사람의 용모에 색채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솟아나오는 힘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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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04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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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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