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반아문화사] 벨라스케즈(VELAZQUEZ)와 고야(GOYA)의 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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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VEL ZQUEZ의 작품
1-1. 화가 소개
1-2. 작품 설명 : Las Meninas

2. GOYA의 작품
2-1. 화가 소개
2-2. 작품 설명
2-2-1. La Vendimia
2-2-2. Maja Vestida y Maja Desnuda
2-2-3. Las Parcas
2-2-4. El 3 de Mayo de 1808 en Madrid

3.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목숨을 '할당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왼쪽 끝의 인물은 가위를 들고, '할당된' 기한이 오는 대로 생명의 '줄'을 끊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인물은 갓 태어난 아기를 운명의 신들에게 건네준 어머니일까, 아니면 아직 성적 능력이 왕성했던 시절의 고야 자신일까. 둘 중 어느 누구로 보더라도 많은 자식을 어려서 잃은 어버이의 쓰라린 회상이다. 호세파는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하비에르를 빼고는 모두 운명의 신이 휘두른 가위에 일찌감치 생명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 그림에서는 그런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고야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만년의 석양빛 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날을 스스로 점치고 있는 고야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고야의 붓은 마치 그에게 들려 있는 악령을 쫓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거의 폭력적으로 벽에 색채를 부딪쳐갔다. 화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보면, 도대체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틈 물감이 대담하고 무참하게 처리되어 있고, 휙 쓸고 지나가는 듯한 터치의 속도감은 얼마 남지 않은 고야 자신의 생명의 급박함으로 느껴진다. 하나의 유서같이...
2-2-4 El 3 de Mayo de 1808 en Madrid
El 3 de Mayo de 1808 en Madrid: Los fusilamientos de la Montana de Principe Pio
유화 (268x347 cm). 제작년도 : 1814년
마드리드, Museo del Prado 소장
1808년 Carlos IV와 그의 아들 Fernando가 잇따라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이때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는 스페인을 점령하였다. 프랑스 점령 후에도 Goya는 궁정화가로서 프랑스와 스페인 장군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 후 나폴레옹 군대가 추방당했지만 Goya는 프랑스군에 봉사한 것을 용서받았다. 1813년 그는 Fernando VII에게 유럽의 전제군주에게 대항한 명예로운 민중봉기를 기념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1810년부터 1814년까지 Goya는 그의 유명한 에칭판화 연작 《Los desastres de la guerra, 전쟁의 참화》(1810∼1814)과 2개의 대작 《1808년 5월 3일 El 2 de Mayo de 1808》(1809)과 《El 3 de Mayo de 1808》(1809)을 제작하였다. 그는 페르난도 7세의 프랑스로부터의 귀국을 축하하고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마드리드 거리에 세워지는 수많은 아치 가운데 하나에 내걸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유럽미술은 기독교 미술로 출발했다. 중세를 통해서 화가들은 기독교와 그 주변에 있는 인간의 관념 및 꿈을 묘사하였고 인간의 다양한 형태를 그렸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자 모든 것이 인간화되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신화도 묘사 대상이 되었다. 인간을 그리는 것이 근본적인 테마가 되고, 거기서 초상화가 탄생한다. 위대한 인물과 행동이 묘사되고, 거기에서 역사화가 싹트고 영웅을 그리게 된다.
이탈리아의 미술사가인 벤투리가 "고대의 詩가 호메로스에서 출발하듯, 근대 회화는 고야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듯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美'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 그림은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추하고, 그림인데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眞實'이다. 그때까지의 고전주의적인 미와 예술의 이혼(離魂)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역사적 사실이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에 가장 명백히 나타나 있다. 앙드레 말로가 고야론의 결론으로 삼은 "여기서 현대 회화의 막이 열린다"는 말을 한 것도 결국에는 같은 의미이다.
5월 2일 대낮에 프랑스군을 습격한 군중은 저녁에는 이미 군중이 아니었다. 프랑스 뮈라 장군은 전군을 동원하여 이 군중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중에는 현장에서 즉결 처형된 이들도 있었다. 『1808년 5월 3일, 프린시뻬 삐오 언덕에서 벌어진 처형』은 바로 이 얼굴없는 근대 조직이 강제에 의해 군중에서 개인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처형하는 그림이다.
끔찍한 처형 무대가 된 프린시뻬 삐오 언덕은 몽클로아(Moncloa) 언덕이라고도 불린다. 고야는 이 언덕을 여러 번 그린 적이 있으며 젊은 시절부터 언제나 행복한 추억이 따라다닌 곳이었다. 처형이 이루어진 것은 5월 2일 저녁부터 3일 오전 4시경까지였다. 배후의 악마처럼 검붉은색으로 떠올라 있는 교회나 수도원은 이 근처에 그럴싸한 건물이 몇 개나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림은 얼굴을 볼 수 없는 프랑스 군인이 일렬로 늘어서서 무장하지 않은 양민을 향해 총을 겨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교회의 종탑이 보이고 프린시페 피오 언덕 아래에는 커다란 등불이 켜져 있다. 그림 왼쪽에는 총살당한 시체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흰옷 입은 한 남자가 팔을 높이 든 채 에스파냐를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양민들은 등불 앞에서부터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두려움의 표정이 역력하다.
전쟁에 대해 체념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들의 참혹한 모습을 그림 중앙의 등불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했다. 빛을 통해 잔인한 인간성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민들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나폴레옹전쟁이라는 역사적 진실과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고야는 민중봉기를 기념하자고 했지만 사실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무지와 오만이 빚어내는 인간의 잔혹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림은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과 피카소의 《한국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3. 참고문헌
홋타 요시에, 『고야』, 한길사, 서울, 1998
이반 나겔, 『뚜쟁이인가, 예술가인가』, 효형출판, 서울, 1999
Alicia Lewin, Vel zquez, Aldeasa, Madird, 1995
Museo del Prado, http://www.mcu.es/prado/Vel zquez.html
Vel zquez, Diego http://www.terra.es/personal/jesus.ru/
http://www.imageone.com/goya/index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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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8.18
  • 저작시기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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