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아관파천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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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아관파천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면서

Ⅱ. 아관파천과 한-로 관계
1. 청일전쟁을 전후 한 한국과 열강
2. 아관파천과 한-로 교섭
3. 러-일 경쟁과 한국문제
4. 러시아군사관교판단과 그 활동

Ⅲ. 맺음말

본문내용

정적 문제를 포함하여 스스로 러시아의 지원에 의지하여 나가려고 하였다. 러시아에 의존하여 얻게 되는 형식적인 독립이 일본에 의한 지배의 위협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열망에 대해서 러시아는 시종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건설과 러시아 시장으로서의 만주확보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의 문제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정부는 한국 국왕의 궁궐수비대를 창설하여 국왕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 이상의 적극적 정치적 행동을 꺼렸다. 경제적으로도 한국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지원하여 그들의 경제적 영향을 확대하기를 시도하기 보다는 현상유지책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 기대하였던 만큼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일본정부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일본 정부는 삼국간섭으로 요동진출이 좌절된 수 한반도 진출에 적극적인 성의를 표하였다. 일본의 이같은 적극적인 진출 정책은 무모할 정도로 강경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의 진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민비에 대하여 시해를 저지를 정도까지 초강경의 강압책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초강경책은 그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정부에 확보하였던 기득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은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 조선정책을 유화시키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대결을 통한 방책 보다는 러시아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고 물러선다는 정책이었다. 아관파천 직후 서울에서 채택된 베베르-고무라 각서나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는 모두 이러한 일본의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아직 일본에 대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하여 러시아의 의사를 정면에서 거스를 정도의 힘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타협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제한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는 삼국간섭에 굴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외교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아관파천에서 환궁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정부의 외교정책과 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자. 아관파천은 우선 강압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하던 일본의 압력을 벗어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 공관에 이러한 일년 동안에 한국정부로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았다. 베베르 공사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대러시아 외교를 행하였으며 이 시기에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라고는 민영환 특사를 황제대관식을 기회로 러시아에 파견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러시아정부의 입장에 대해서 정확한 분석은 고사하고도 국저적인 감각도 가지지 못하였다. 민특사 일행은 전혀 정치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며 지나치게 긴 세월을 낭비하였다. 한국정부가 그토록 갈망하던 국왕의 수비라고 하는 목정은 러시아의 소규모의 군사교관단의 내한으로 이루어 질 수는 있게 되었고 고종의 환궁시 수비에 대한 약속도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 일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한국 정부의 상태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얻어낸 것이 없었다. 고종의 환궁은 궁권 수비대의 창설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일본이 다시금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고종의 환궁을 계기로 하여 한-로 관계를 손상시키고 한국을 다시금 일본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정책을 신속하게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정하고 뚜렷한 방향감각을 상실한 한국정부는 다시금 러-일 각축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의문은 ‘과연 러시아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탈냉전 이후 소련의 붕괴로 국제적 세력이 많이 약화 된 상태에서 다시 과거의 영화로의 회귀를 꿈꾸는 러시아가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의 한반도에게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전체 역사를 조명해 보지 않고, 아관파천을 전후한 이 시기만 들여다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외교적 취약성은 금방 드러난다. 국제적 감각이 부족하고, 외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던 우리로서는 하나의 외세를 배격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수를 범했으며 그나마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익추구에 놀아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점들이 수 십 년이 흐른 현재에 들어서도 여전히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교력을 십분 발휘하여 난관에 봉착해 있는 남북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못하고 미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채 그들의 정책에 좌지우지 당하는 작금의 실태는 자칫하다가는 과거 고종이 범했던 실수를 재현할 수 있는 우려를 낳는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러시아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6자회담로서 만이 아니라 그들과 우리가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를 잘 조합하고 유도 해 내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같이 그들의 이익에 이용당하는 사태를 막음과 동시에 남북 관계의 발전과 더 나은 한-로 관계의 형성이라는 결과를 얻어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권희영, 「한국과 러시아: 관계와 변화」,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 한국을 둘러싼 러·일 갈등」, 서울 : 국학자료원, 2002.
이현종, 「아관파천」,한국사연구협의회 편,『 한로관계100년사』, 서울 : 한국사연구협의회, 1984.
최문형, 「(국제관계로 본)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병합」, 서울 : 지식산업사, 2004.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서울 : 지식산업사, 200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期의 국제관계」, 서울 : 동림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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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08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9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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