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잉카문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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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금의 제국, 잉카문명 속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황금의 제국, 잉카문명 속으로
(1) 음식문화
(2) 옷
(3) 집
(4) 사회구조와 통치구조
(5) 종교
(6) 풍습
(7) 제도

3. 끝맺음

4. 참고자료

본문내용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그 사이를 많은 간선도로들로 연결한 매우 효과적인 도로망이었다. 수레를 사용하지 않았던 잉카인들이 이처럼 넓게 길을 정비했던 까닭은, 물론 교역과 물자수송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많은 군인들을 빨리 이동시키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군이 떠날 대는, 항상 새로 길을 넓히고 중앙정부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연락망을 구성했다.
잉카의 연락제도로는 땀보제도와 차스끼제도가 있다.
땀보는 약 20-30km 간격으로 세워진 역으로, 숙박시설과 함께 그 지역의 마을에서 책임지는 왕의 창고와 태양신의 창고가 있었고, 땀보 건물도 역시 그 마을 사람들이 책임지고 유지시켜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차스끼는 교환하다, 주다, 받다라는 뜻으로 릴레이 경기 주자들이 바통을 주고 받듯이 연락을 주고받도록 한 제도이다. 그들은 각 오끄로 오두막집
에 서너명씩 머물면서 교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한쪽에서 차스끼가 달려오는 것을 보거나 그가 부는 소로고동소리를 들으면 즉시 달려나가 연락을 전달받았다.
차스끼제도 외에 언덕 위에서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내는 연락방법도 있었지만 이는 어느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다거나 하는 아주 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되지 않았다.
4) 사냥
매년 왕은 차꾸라는 사냥행사를 열었다. 차꾸란 ‘멈추다’라는 뜻인데, 사냥 방식이 동물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멈추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차꾸는 매년 동물들의 번식기가 지난 다음 한 지역을 골라,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 지역을 둘러싸게 하고 서서히 그 둘레를 좁혀 동물들을 가운데로 몰아넣으며 하는 사냥이다. 동물 등 중에서 육식성 동물은 즉시 죽였고, 초식동물들은 사로잡았다. 암컷들과 튼튼한 수컷 중 일부는 풀어주었는데, 와나꼬와 뷔꾸냐는 풀어주기 전에 털을 깎았다. 이 때 잡은 짐승들은 그 숫자와 종료, 성별 등을 끼뿌에 기록했다.
5)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꾸스꼬의 왕실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잉카의 초기시대 때부터 충성을 하던 주변마을에서 뽑아졌다. 이는 굉장한 영예로 여겨져 사람들은 왕의 하인이 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각 마을에서는 각기 다른 분야의 일을 할 하인들을 파견했고 보다 완벽한 서비스를 위해 특별한 훈련들을 했다.
꾸스꼬의 치안을 담당하는 자들은 왕의 서자들이나 귀족들의 자식들 중에서 선출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신분의 표식으로 왕의 옷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그들만의 무늬가 있는 꼬까 담는 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다. 이들은 범인을 잡아 심판관들에게 넘기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가난한 자와 정직하지 못한 자는 매수될 위험이 있으므로 임명되지 못했다.
6) 지방행정관
각 지방의 행정관은 중앙에서 직접 파견했는데, 그 임명기준은 능력보다는 혈통이 우선시 되었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지방행정관은 별 볼일 없는 하위직이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장애인들을 주로 임명했다.
잉카왕은 특히 한쪽 눈이 없거나 사팔뜨기들을 싫어했는데, 그들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임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을 보조해 주는 직에는 각 지방의 꾸라까들이 임명되었으며 중앙정부에서 내려온 행정관은 그저 이름뿐이고 실질적인 책임과 능력이 있는 자는 바로 이들이었다.
7) 시장
전국의 시민들은 9일에 한번씩 행정중심지에서 열리는 시장에 갈 의무가 있었다. 이 시장은 농부들이 하루 일을 쉬고 이웃들과 만나 휴식을 즐기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보다 큰 이유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새로 제정된 법령이나 새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꾸스꼬의 시장은 중앙광장 꾸시빠따에서 열렸다.
8) 도량형
잉카인들이 곡식을 달 때는 꼬요라는 됫박을 사용했는데 주로 조롱박으로 만들었고, 은이나 나무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1꼬요는 약 3.8리터 정도이다. 땅의 넓이를 재는 단위인 뚜뿌는 가로 42m, 세로 84m의 넓이를 나타냈고, 길이를 잴 때도 역시 같은 용어를 썼는데 1뚜뿌는 약 7.2km였다. 잉카인들의 무덤에서는 가끔씩 같은 무게의 추들이 발견되기도 해, 그들이 무게를 다는 도량형도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9) 여자들
여자들은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수다를 떨고 거짓말을 즐기며, 진실을 숨기려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증인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도시의 외곽에는 포로로 잡아온 여자들을 모아 만든 공창이 있었다. 이 여자들은 들판에 외따로 떨어진 움막 안에 따로따로 살았고 마을 안에 들어가는 일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여자들을 빰빠루나, 즉 들파느이 사람들이라 불렀다. 남자들은 이들을 매우 비열하게 다루었고, 마을 여자들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되었다. 만약 한 여자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명의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져 임신을 하게 되면, 그 아이는 여러 남자의 피를 물려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빰빠루나의 아이들은 삽시츄리, 즉 공동의 아이라고 불리어졌다.
Ⅲ. 끝맺음
잉카문명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면서 약간은 실망스런 부분이 없잖아 있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잉카에 대한 환상이 여러 방송매체를 통해 얻은 얕은 지식의 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근거없는 환상이었다고 할까나. 내가 만들어낸 잉카인들이 외계인과 다를 바 없었다면, 조사를 통해 얻어낸 잉카인들의 모습은 ‘사람’이었다. 그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그러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아무래도 나는 잉카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잉카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더더욱 스페인이 침략하기 이전의 잉카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황금으로 둘러싸인 나라. 그렇기에 스페인이 더더욱 탐욕스런 모습을 드러내어 무자비한 침략과 약탈을 자행하게 만든 나라. 여전히 잉카문명의 잔재가 남아있는 페루는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의 하나이며, 꼭 가야할 곳 중에 하나이다.
Ⅳ. 참고자료
- '잉카속으로' 권병조 풀빛 2003 - '잉카문명의 신비' 전규태 백문사 1988 - '잉카 신화' Urton, Gary, 임웅 어튼, 게리 범우사 2003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5.12.13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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