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 사찰조사(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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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건축 사찰조사(송광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요약

설명

역사

현황

문화재

대웅보전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본문내용

구하고 처마 밑의 공포는 과중하게 3출목으로 짜 올렸는데 이는 건물의 외관을 한층 더 크고 장중하게 꾸미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공포는 내부에서 오히려 2출목으로 감축되었으며 그 이유는 중첩되는 공포의 부피 때문에 천장의 공간면적이 좁아지는 것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때문에 대들보를 받는 공포의 살미 끝은 양봉(樑奉)의 형태처럼 확대되었다.
한편 천장의 네 모서리에는 귀살미와 그 좌우의 살미 끝이 길게 뻗어 나와 그것을 교차시켜서 연결한 묘한 부재가 생기게 되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그 중앙 후면에 불단을 놓았는데 그 위의 닷집은 보개형식으로 되어있다.
(참고)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절의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좁은 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세운 소박한 건물이다
[영산전 전경]
[영산전 공포]
[영산전 정면도]
[영산전 측면도]
[영산전 평면도]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송광사의 가람은 대체로 대상(臺上)과 대하(臺下)로 구분되는데 이는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하사당은 대상에 있는 건물로서 절에 부속된 승방건물의 하나로 주거건축과 유사한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그 건축양식이 조선초기의 수법을 따르고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희귀한 유구이다. 바로 옆에 위치한 상사당(上舍堂, 일명 三日庵)과 함께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상·하사당을 같이 사용할 때는 구참납자는 상사당, 신참납자는 하사당에 거처하면서 수선(修禪)했다고 한다.
평면형태가 정면 3칸, 측면 3칸이긴 하지만 남부지방 민가(民家)의 일자(一字)집 평면을 하고 있어 정면에서 보아 우측 한칸에는 부엌을 두고 다른 2칸은 방을 들여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남쪽 퇴를 들어서면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한 짝의 띠살문양의 창호를 방에 각각 달았다. 또 부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2짝 판장문을 달아 밖으로 여닫게 하였다.
왼쪽 2칸의 방은 원래는 온돌이었으나 현재는 건물의 보존상 그리고 화재의 위험을 감안하여 온돌을 없애고 마루로 대용하여 서고(書庫)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1고주 2량으로 이웃한 삼을암이 팔작지붕인 것에 비하여 하사당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이고 부엌은 연등천장이므로 내부가구는 드러나 있다.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에서 후면의 평주에 걸쳐 통보로 걸렸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본래 부엌 지붕 위로 네모난 구멍을 내고 그 위에 조그만 맞배지붕을 만든 환기공을 달아낸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훼손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원형이 복구된 상태이다. 이것은 환기용 솟을지붕으로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공포는 원주 위에 짜인 주심포 형식인데 출목을 하나 두고 행공첨차로 외목도리를 받치는 형식이다. 주두 밑에 헛첨차가 익공식으로 돌출하고 그 위에 이와 비슷한 두공을 올려놓되 짧은 헛보와 같은 형태로 그 위의 퇴보를 받고 있다. 퇴보는 주심(柱心)을 초공(草拱)과 같이 받고 보머리에서 외목(外目)을 받치고 있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것은 대공이라 할 수 있는데 측벽에서 보이는 대공은 소위 타봉형(낙타 등 모습) 또는 산형(山形)의 대공을 사용하고 내부의 것은 초기적 복화반형(覆花盤形)을 하고 있어 일본에서 중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이다가에루마다’와 비유된다. 첨차는 쌍S자형 첨차로 주심의 첨차 역시 같은 형이다. 다만 외목도리를 지탱해 주는 살미첨차가 적고 상대적으로 처마가 길게 돌출되어 첨차에 다소 과중한 무게가 실린 것 같다. 또 다른 이유에서는 전면의 처마는 겹처마이고 배면은 홑처마이기 때문에 지붕의 무게가 앞쪽에 더 실리게 된 까닭도 있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식이나 대공형식으로 보아 국사전과 동일한 건축양식임을 알 수 있고 조선 초기 건축물에 속하는 맞배지붕 집으로 믿어진다.
하사당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주심선상에 놓인 제2소로가 옆갈이 있는 네 갈 소로라는 점이다. 이것은 수장폭(修裝幅)으로 돌출된 퇴량이 뜬장혀보다 운두가 큰 상태로 결구되어 운공이 퇴량 뺄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심위치의 소로에 옆 갈 소로가 사용된 예로는 전주객사(全州客舍)의 주관과 더불어 처음이다. 전주객사 주관의 건축연대를 15세기 초로 송광사의 하사당을 1450년으로 추정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참고)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져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제자들에게 당부하여 다시 지었다. 지금의 절은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그 중 스님들이 생활하던 하사당은 대웅전 뒤 한층 높은 곳에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왼쪽 2칸이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장식을 겸하는 간결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부엌 지붕 위로 네모 구멍을 내고 조그만 환기구를 만들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僧房) 건축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사당 정면도]
[하사당 종단면도]
[하사당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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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6.02.23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7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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