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참된 언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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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재필(참된 언론을 꿈꾸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 신지식층의 대두와 언론

Ⅱ. 본 론

ⅰ. 서재필과 <독립신문>창간

ⅱ. 서재필의 사상

ⅲ. 서재필에게 가해진 탄압

ⅳ. 독립협회에서의 활동

ⅴ. 서재필에 대한 비판

Ⅲ. 결 론

본문내용

신문사를 운영하다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거액의 현금(24,400원)을 벌어갔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신용하는 그의 저서 <독립협회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이 부채는 31운동 직후에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6,00불을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에서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 때 그가 가져간 24,400원은 비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문사를 서재필의 명의로 등록한 것에 대해 신용하는 “신정부의 각료들은....각종의 이권이 구미열강에게 양여되고 침탈되는 것조차 막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으므로 서재필이 독립신문사를 자기의 사유기업으로 등록하는 것쯤은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한 것이었다”고 평하였으나, 한철호의 견해는 다르다. 한철호는 신용하의 시각이 박정양이완용 등을 주축으로 성립된 정동파 내각의 신문에 대한 인식을 고려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지적한다. 한철호의 말을 들어보자.
“정동파내각은 1896년 1월경 김홍집내각과 서재필이 합의했던 사항들을 그대로 재승인하여 신문 창간비로 4,400원을 보조해 주는 동시에 정동 소재 정부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모두 서재필의 개인 소유로 등록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이유는......박정양 등이 미국의 신문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은 민간지였으며, 또한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는 <한성신보>도 민간지 형태를 취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즉, 정동파내각은 <한성신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정부시책을 널리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관보보다는 미국의 신문이나 <한성신보>와 같은 민간지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철호, <친미개화파연구>(국학자료원, 1998)
■ 서재필은 승미사대주의자였나?
당시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침략의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박애와 평등의 방패를 뒤집어 쓴 선교사들을 우리나라에 들이미는 한편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친미분자들을 육성하기에 급급하였다. 동시에 조선침략의 발판을 닦기 위하여 승미사상과 기독교선전에 열을 올리였다. <독립신문>에는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관계한 반면에 바로 미제에 의하여 육성된 서재필, 윤치호와 같은 친미배족분자들이 관계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은 개화문명에 대하여 떠들 때면, 미국 시민사회의 본을 따르도록 권고하였으며 자주 ‘구미문명’의 소개와 기독교 선전에 골몰하였다. 신문 제4면을 영문으로 편집한 것도 미제를 비롯한 구미제국에 우리나라 실정을 하소연하여 독립을 유지해보려는 외세의존, 승미사대의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렇게 승미사대주의를 부식시킨 것은 이 신문의 본질적 약점이며 심중한 부정면이다. 신문이 가진 이러한 부정면을 가리면서 근대일간 신문의 체제를 갖추고 일정하게나마 자유민권사상을 제창하였다고 하여 그 역사적 지위와 역할을 일면적으로 과장하거나 지어 우리나라 신문의 ‘전통창시자’로 분식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용필, <조선신문 100년사>(나남, 1993)
이런 비판과 아울러 서재필은 한때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라 했고, 또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힘으로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인은 이와 같은 일본의 덕택을 인정하여 일본에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비판에 대해 미국 휘튼대학 동양사 담당 교수인 비판 찬드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몇 가지 극단적인 친일적 진술과 한국을 경멸하는 발언이 그들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언은 어떤 순간적인 좌절감이나 안타까움으로 인한 감정의 폭발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힘이 압도적으로 약할 때 사람들은 가끔 이런 태도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서재필의 친미 내지는 친양적 자세는 제도적 문제이다. 그는 유교사상을 극력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필자는 그들의 애국심, 즉 민족주의적인 정신은 남에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진석 외, <한국근대언론의 재조명>(민음사, 1996)
Ⅲ. 결 론
언론인으로서 서재필은 우리나라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처음으로 비록 자금 면에서 논쟁을 낳고 있지만 최초의 민간신문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또한 그는 미국생활을 통해 얻은 언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국민계몽운동에 힘썼다. 독립신문의 형식을 보아도 그의 의도와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으로 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국문만을 쓴다고 밝혔다. 독자의 투고를 요청하면서도 “한문으로 한 편지는 당초에 상관 아니 함”을 밝혀 반드시 한글을 써서 기고하도록 했다. 이 신문은 기사는 물론 논설에서도 되도록 쉬운 우리말을 썼다. 이 신문은 아울러 읽기 편하도록 띄어쓰기를 실시했다. 지배층위주가 아닌 일반 민중을 위해 제작되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신문이 개화운동에 선두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처럼 서재필은 우리나라 언론의 선두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여러 비판적 논쟁들이 있지만 우리나라 언론에 있어서는 정말 큰일을 한 것이다. 최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서재필에 대해서 추앙하고 자기 신문이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지라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서재필을 이용해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는 정확한 자료와 그 당시 시대상황을 이해하여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권력변환, 인물과 사상사, 강준만 지음, 2003
한국언론사, 나남출판, 김민환, 2001
한국사인물열전3, 돌베개, 2003
정진석 외, <한국근대언론의 재조명>(민음사, 1996)
네이버 인물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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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03.12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9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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