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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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본론
학교 창립과 대동 청년당 조직
백산상회 설립과 부산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지도
협동조합운동과 언론 활동
연통제 구성과 육영회 조직
발해농부산 활동에 얽힌 일화
발해농장과 대종교 활동
‘백산정신’을 기리며
백산의 동지들 재조명은 역사적 과제

3. 맺음말

본문내용

을 통한 역사상의 정당한 자리매김 시도는 부산, 경남을 비롯한 영남일대의 독립운동사 복원이란 대명제에 버금가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산의 항일 독립운동 행적에 씨줄과 날줄과 연결되면서 저마다 나름대로 현대사에 굵은 획을 그은 동지들을 백산의 행적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지주 향반 출신으로 혁신유림 계통인 백산은 어려서 고향 의령에서 한학을 배우다 풍전등화의 국운 앞에 신학문을 통한 자주 독립사상 고취가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상경, 을사5조약이 강제체결된 다음해 보성전문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양정의숙으로 전학했다.
양정의숙 재학중 백산은 일송 김동삼(서로군정서 참모장˙임정 국무위원)이 주도한 안동의 협동학교 설립을 돕고 고향 의령에 의신학교(1907)와 창남학교(1908)를 세웠으며 자신이 설립에 깊이 간여한 현재 구포초등학교의 전신인 구명학교 교장에 취임(1909), 2년간 재임한다.
이 과정에서 백산은 구한말 ‘철도왕’이자 부산의 선각자였던 박기종(1839~1907)의 사위인 구포의 애국청년 청운 윤상은을 만나 평생지기로 사귄다.
청운은 구명학교 설립은 물론 백산도 주주(10주)로 참여한 구포저축주식회사 및 이를 발전시킨 국내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인 구포은행 설립(1912년 6월 23일)에 주독적 역하을 했으며 주주(50주)로 참여했다.
백산은 1909년 10월 서상일(조선국권회복단 외교부장), 김동삼, 남형우(임정 법무총장) 등과 함께 국권회복의식이 투철했던 17~30세의 영남출신 계몽지식인 청년들을 주축으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했다.
남형우가 초대단장, 백산이 초대 부단장과 2대 단장을 맡은 대동청년당은 부산 백상상회의 상업조직과 대구의 서상일, 윤상태(조선국권회복단 총령)를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을 중추조직으로 삼아 인재양성, 독립운동자금 조달, 국내외의 상호연락을 통한 국외 독립운동단체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백산상회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의 중심인물들은 학연, 지연 등으로 얽혀 상당수가 이들 세 조직에 겹쳐 가담했으며 대부분 독립운동 지도자로 성장했다.
대동청년당 단원에는 신채호(임시정부 의정원 전원위원장), 윤세복(대종교 3세 교주), 신팔균(통의부 군사위원장), 이수영(의열단원, 백산상회 서울연락사무소), 이경희(의열단원, 신간회 대구지회장), 최윤동(의열단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곽재기(의열단원, 밀양 폭탄사건), 장건상(동제사, 코민테른 고려국 고문), 이호연(만주봉천에서 백산상회 연락사무소인 해천양행 경영), 이극로(조선어학회장), 윤병호(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이우식(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윤상태, 김홍량(신민회), 최완(임시정부 내무부 위원) 등이 포함돼 있었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진력하다 1921년 29세로 요절한 양산 출신 우산 윤현진은 대동청년단 단원이자 구명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윤상은의 친조카였다.
백산은 경술국치 다음해인 1911년 러시아로 망명,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회복 방략을 논의하고 중국의 독립운동단체를 두루 방문한 뒤 1941년 9월 국내서 독립운동에 진력키로 결심하고 귀국했다.
이처럼 백산은 광범위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당시의 선각자들, 특히 부산˙경남을 비롯한 영남출신의 동지들과 폭넓게 연대하며 힘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백산의 동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항일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데다 광복 후 친일파가 득세하고 이념대립과 6.25전쟁, 군부독재가 이어지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고 후손들이 되레 박해를 당하기도 하는 바람에 소리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말았다.
더욱이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학계에서도 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연구가 뒷전으로 밀리면서 임시정부와 해외무장항쟁 등 큰 얼개만 짜여지고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은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3. 맺음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빛낸 많은 인물들 중 백산 안희제 선생에 대해 알아보았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전세계가 하나의 생활권 속으로 들어오고 하나의 세계체제를 형성해나가면서 국가간의 장벽은 이미 무너졌으며, 세계 경제권 역신 WTO체제 속에 묶어져 국가간의 협력과 경쟁은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단계에 국가주권의 확보와 유지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것만이 최고라는 선민적 의식이 아니라, 경쟁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지켜나가기 위한 하나의 몸짓이자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무형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하는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우리의 문화는 서서히 제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은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관문의 도시로서 영욕의 역사를 거쳐 왔다. 이러한 역사 속에 부산을 빛낸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분들의 활약상은 때로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때로는 숙연하게, 또 어떤 때는 뭉클한 감동을 주는 분들도 계신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통하여 이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옷깃을 여미면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하루 백산의 유품 80여 점이 모여져 있는 백산 기념관을 찾아 백산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지...
<참고문헌>
외솔회, 『나라사랑』 제19집(백산 안희제 선생 특집호), 1975.
부경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부산인물사』, 선인, 2004.
부경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선인, 2004.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1998.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부산의 역사와 문화』,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8.
『부산, 역사향기를 찾아서』, 부산은행,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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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05
  • 저작시기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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