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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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의 대외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고려와의 관계
(1)몽고와 고려의 접촉
(2)몽고의 잇따른 침입과 고려의 항쟁
(3)고려 원종의 즉위와 삼별초의 항쟁
(4)쿠빌라이의 元 제국 수립
(5)원의 간섭내용
(6)원의 멸망과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3. 일본과의 관계
(1)몽고와 일본의 평화를 위한
고려조정의 외교적 노력
(2)원의 일본 침공의 경과 및 결과

4. 元代 동서문화교류
(1)동서 교통로와 무역의 발달
(2)외국인 우대책과 서방문물의 전래

5. 이슬람 문화의 수용

6. 나오며

본문내용

종에 달하였다.
(2) 외국인 우대책과 서방문물의 전래
수당대 동서교역은 이란계의 소그드인이 주로 담당하여 활약하였으나 이슬람 세계가 확대되고 유럽아시아에 걸친 몽골제국이 성립됨에 따라 아라비아와 터키계의 이슬람상인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이들은 隊商을 조직하여 동서교역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몽골제국의 색목인(서역인)을 우대하였으므로 그들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몽골제국 내에는 많은 유럽인이 찾아와서 유럽의 학술과 종교를 전파했는데, 특히 가톨릭교의 신부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 여행가로는 세조 때 몽골에 와서 17년 동안이나 살다가 귀국하여 『동방견문록』을 지은 이탈리아 출신 마르코 폴로와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바투타 등이 유명하다. 몽골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이들 외국인이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장기간 중국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우대정책 때문이었다.
몽골족의 유럽원정으로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특히 로마교황은 몽골의 잔인한 유럽정복전쟁에 충격을 받아 몽골인과 중국인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신부를 파견하였다.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은 大都에 와서 성당을 세워 포교활동을 하고 성서를 몽골어로 번역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十字寺라 하였다. 당대에 유행하던 네스토리우스교[景敎]는 몽골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발전하면서 몽골왕족 사이에 신자가 늘어났다. 세조 쿠빌라이의 모친도 경교신자였다고 한다.
5. 이슬람 문화의 수용
원대에는 서역인의 중국내왕과 이슬람교의 신봉으로 이슬람교가 중국의 각지에 보급되었고 이슬람교를 回回敎[淸眞敎]라 부르며 사원을 回回寺[札拜寺]라 하였다. 그 교도를 다시만이라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어의 학자[敎師]를 의미한다.
한편 원대에는 서역계통의 이슬람교도 이외에 해방된 노예나 이교도의 자손 혹은 몽골 인이나 중국인 가운데서도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세조의 손자인 아난다와 그의 부하 15만 여명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예도 있다.
원대의 이슬람상인은 다양한 상품을 가지고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몽골 귀족의 영지에서 세금청부를 맡거나 귀족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고리대를 경영하는 자도 나타났다. 특히 이슬람상인의 고리대금은 이자율이 아주 높아, 민간에서는 ‘양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새끼가 치는 것과 같이 이자가 는다.'하여 ‘羊羔利’라 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슬람교도는 색목인 가운데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우수하였기 때문에 원 제국 내에서 그들의 문화 활동은 천문역법자연과학 방면에 큰 업적을 남겼다. 몽골 인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曆은 원초의 공신 야율초재가 제작하였다는 ‘西征庚午元曆’이다. 이어 세조 때 (1267) 이란인 자말웃딘이 천문관측기를 만들고, 萬年曆이라는 새 달력을 제작하였으며 回回司天臺[이슬람 관상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원대의 중국인은 단순히 서방의 과학을 수입하여 사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중국의 전통적인 지식을 이슬람문화에 가미하여 새로운 문물을 창조하였으니 郭守敬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여러 가지의 새로운 기계를 제작하였고 대도에 천문대를 세웠으며 황제의 명을 받아 아라비아의 달력을 참고로 授時曆이라는 새 달력을 제정하였다(1280). 지리학에서도 주은본은 아라비아의 지도 제작법을 배워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명대에 수정되어 皇輿圖가 되었다. 유태인으로 알려진 애설은 천문학과 의학에 뛰어났고, 아랍인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은 투석병기를 개량하여 큰 돌을 적진에 날라 가게 하여 남송을 정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밖에도 의학약학방면에 뛰어난 기술이 유입되어 생활에 널리 이용되기도 하였다. 생활풍습에서도 서아시아의 手織物이 유행하고 이란식의 신발을 신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숄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음식물에도 유목민 특유의 쿠미즈, 牛酒가 보급되고 서역산 포도주와 설탕이 애용되었다. 예술방면에서는 정열적인 이슬람 음악과 함께 여러 가지 악기가 전래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원대의 이와 같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몽골인의 수용 자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원대에 전파된 외래문화는 상류사회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고 중국의 전통문화와 유화되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이 점이 당의 외래 문화수용 자세와 큰 차이가 있다.
6. 나오며
지금까지 원의 대외관계를 고려와 일본, 동서문화교류와 이슬람 문화의 수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고려는 몽골제국시기에 잇따른 몽골의 침입에 항쟁하며 국토를 지켰으나 쿠빌라이의 원 제국 수립 이후 원의 간섭 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원 황실과 혼인 관계를 통하여 조공을 바치고, 관제를 강등하며, 일본 침공에 동원되는 등 자주성의 시련을 겪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좌절되자 고려와 연합하여 남송군, 고려군에 힘입어 두 차례 큰 침공을 하였다. 그러나 모두 태풍으로 인해 일본은 국가적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세계 제국을 성립시켜 동서 교통을 방해하고 있던 장벽을 제거하였으며,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참적(역전)제가 완비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교통이 크게 발달하였다. 또한, 원대에는 서역인의 중국내왕과 이슬람교의 신봉으로 이슬람교가 중국의 각지에 보급되었고, 몽골 제국의 색목인(서역인) 우대로 인해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는 색목인 가운데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우수하였기 때문에 원 제국 내에서 그들의 문화 활동은 천문역법자연과학 방면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원대에 전파된 외래문화는 상류사회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고 중국의 전통문화와 유화되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되기도 하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변태섭, 『韓國史通論』, 삼영사, 2003
신승하, 『중국사』(하), 대한교과서, 2005
신채식, 『東洋史槪論』, 삼영사, 2000
이영(Lee Young),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일본역사연구』9, 1999
진순신, 『대하역사평설 - 중국의 역사』8, 한길사, 1995
※참고인터넷 사이트
http://www.naver.com
http://www.google.com
http://www.ma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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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9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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