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승과 박희도(민족대표 33인) 인물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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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준승과 박희도(민족대표 33인) 인물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박준승
1. 요약정보
2. 연표
3. 상세정보
4. 신문조서
5. 인물에 대한 견해

Ⅱ. 박희도
1. 요약정보
2. 연표
3. 상세정보
4. 신문조서
5. 인물에 대한 견해

본문내용

상황으로 독립이 되게 되는가, 또 그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했는가.
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어있는 것, 그것은 정의 인도에 위반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청원하면 일본도 독립을 허여해 줄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問: 일본이 승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答: 그것은 아무래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은 절대로 승인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問: 그렇게 생각한 것은, 열국의 힘을 빌려서 일본으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독립을 승인하게 만든다는 그런 운동의 취지에서가 아닌가.
答: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일본의 위치는 세계 각국에서 하는 수 없이 승인하도록 할 정도로 약한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問: 선언서, 청원서는 천도교측에서 기초를 담당하고, 선언서의 배포는 예수교측에서 담당하기로 했다는데 그런가.
答: 모두 천도교측에서 기초를 담당했다는 것은 들었으나 배포를 예수교측에서 맡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問: 선언서를 실제로 배포한 것은 누구인가.
答: 모른다.
問: 배부할 때에 선언서를 공중에게 읽어서 들려주라든지, 만세를 부르라는 것을 전달했었는가.
答: 배부한 일조차 모르므로 그런 것은 모른다.
問: 피고는 학생들이 그 무렵에 독립운동을 시도하고 있는 것에 관계는 없었는가.
答: 관계하지 않았다.
問: 지방법원 예심조서에 의하면 金元璧이 그 일에 대하여 피고와 상의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어떤가.
答: 학생들도 한다는 것은 金元璧에게서 들었었다.
領제330호의 3을 보이다.
問: 이것에 의하면 대단히 불온과격한 문구로 되어있는데 그것을 보면 그것에 자극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일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피고 등은 배부 당시에 그것은 생각하지 않았는가.
答: 그런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問: 그러나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고 되어있는데, 이와 같은 문서를 발표하면 마침내는 폭동이라도 일으킬는지 모른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
答: 그와 같은 것이 씌어있다 하더라도 나는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애원하여 승인을 얻으려는 생각이었다.
問: 그러나 선언서를 발표한 결과로 소요가 크게 되고 독립의 소리가 커지면 자연히 강화회의에서 문제가 되고,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에 형편이 좋아질 것이라고 해서 가능한대로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닌가.
答: 그런 일은 없다.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33명이 목을 나란히 하고 온유하게 기다려서 잡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問: 33인이 함께 체포된 것은 그렇게 각오하고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것도 역시 조선민족을 자극하는 수단이 아니었는가.
答: 아니다.
領제330호의 6, 7, 8과 419, 420을 보이다.
問: 이것은 무엇인가.
答: 6, 7, 8은 본 일이 없으나 이와 같은 서면을 제출한다는 말은 알고 있다. 419, 420은 내가 서명 날인한 것에 틀림없다.
작성일대정 8년 8월 23일
고등법원
서기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宮原悅次
신문자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楠常藏
5. 인물에 대한 평가
박희도는 3ㆍ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 서명에 참가하고 그 이후에도 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갑자기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활동노선을 바꾼 인물이다. 때문에 본고에서는 앞의 박준승과 마찬가지로 박희도가 3ㆍ1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측면과 1930년대 그가 왜 활동노선을 바꾸게 되었는지에 대한 측면에 대해 필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3ㆍ1운동에 대한 박희도의 태도는 앞서 본고에 기재하였던 신문조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박희도는 박준승과 마찬가지로 학생ㆍ민중의 움직임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으며, 독립선언을 통해 일본이 정의와 인도에 따라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태도는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여, ‘정의와 인도’라는 관념적인 가치에 기대어 독립을 얻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1930년대 박희도가 친일행각을 벌인 점에 있어서는 일본의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헤게모니가 조선을 잠식하고 있었고, 더욱이 이 무렵 진행된 일제의 파쇼체제 성립은 박희도로 하여금 친일노선을 걷게 하는 기제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 이전보다 더한 탄압이 가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문화적으로까지 종속시킴으로써 일제 침략정책에 부합하는 병참기지로 만들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박희도를 그전까지 꾸준히 노력해온 민족독립운동을 일시에 포기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약하는 등의 친일행각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박희도가 민족해방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정진하지 않았음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물론 박희도가 행한 친일행각을 정당화할 생각 역시 없다. 그렇지만 당대를 살아간 사람에게 ‘왜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나요’라고 묻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질문이 아닐까. 비록 박희도가 친일노선으로 선회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한 인물을 맥락 속에서 바라보지는 않은 채 단편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박희도를 민족의 변절자ㆍ배신자로 평가하는 방법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에 박희도 역시 그에 대한 평가가 운동사적ㆍ친일적 측면에서만 서술될 것이 아니라, ‘그 시대’라는 맥락 속에서 그가 당대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와 같은 내면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그것을 통해 박희도라는 인물을 다각도적ㆍ다층적으로 그려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참고문헌
ㆍ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kh2.koreanhistory.or.kr/)
ㆍ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Korea.htm)
ㆍ민족문화협회 민족운동총서 편찬 위원회, 『민족운동총서 제 2집 : 三一운동』,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0.
ㆍ김윤환 외 9명, 『독립운동총서-2 : 3.1운동』, 민문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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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05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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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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