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대만 뉴웨이브
2. 대만 뉴웨이브의 배경
3. 대만 뉴웨이브의 발달 과정
4. 대만 뉴웨이브의 특징
5. 대만 뉴웨이브 감독
1). 후 샤오시엔
2). 에드워드 양
3). 차이밍 량
4). 그 외의 감독들
2. 대만 뉴웨이브의 배경
3. 대만 뉴웨이브의 발달 과정
4. 대만 뉴웨이브의 특징
5. 대만 뉴웨이브 감독
1). 후 샤오시엔
2). 에드워드 양
3). 차이밍 량
4). 그 외의 감독들
본문내용
* 리안 (李安)
리안 (李安) 감독은 코미디라는 장르로 영화 속에서 자칫 진부해지기 쉬운 요소들을 드라마의 윤활유로 잘 활용하고 있다. <결혼 피로연 喜宴>(1994)으로 94년도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 <음식남녀 飮食男女>. 게이인 아들과 그의 남자 연인,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화해로 이끌어내는 <결혼 피로연 喜宴>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대만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었다. 94년에 만든 세 번째 영화 <음식남녀 飮食男女>는 음식으로 아버지와 세 딸 사이의 세대를 넘어서는 이해를 90년대 대만사회의 단절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이루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 해 깐느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채되었다. 이로써 그는 대만의 대표적인 배우 랑시웅과 함께 ' 아버지 삼부작' 이라 부를 만한 일관된 주제의 작업을 해냈다. 90년대 들어 유럽과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동시에 주목하는 유일한 대만감독으로 부상한 리안(李安)은 처음으로 중국(대만)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17세기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 시대극 <센스, 센서빌리티>(95)를 자신의 네 번 째 영화로 선택한다. 제인 오스틴의 원작소설 「이성과 감성」을 엠마톰슨이 각색 주연한 '미국 영화' <센스, 센서빌리티>는 96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오프닝으로 상영되었고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에도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만 감독과 미국의 자본, 그리고 영국의 원작소설과 영국배우들이 한데 모인 <센스, 센터빌리티>는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겨주었고(엠마 톰슨) 그 이후 리안(李安)의 행보에 대한 일대화두로 떠오른 듯이 보였으며 그 판단은 현재까지 옳다. 대만의 대표적 배우이자 여성감독인 장애가의 (소녀소어)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나 <센스, 센서빌리티> 이후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불가능한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맡은 리안(李安)은 지금 대만영화와 감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서 멀리 떠나 있는 듯이 보인다. 올 가을 미국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의 신작 <얼음 폭풍>(97)역시 '미국영화' 이며 73년 추수감사절을 지나면서 직장과 가정에서 위기를 겪게 되는 미국 중산층의 한 가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1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동장군의 한파를 맞이하는 이 백인 주인공의 고난처럼 영화제작 조건의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만영화의 현실에 리안(李安)의 영화들은 한때 활로를 보여주는 듯했지만,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균형상태를 표현하고자 애쓰는' 감독 리안(李安)은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얼음 폭풍> 이후의 프로젝트를 이미 결정한 상태이다. 그는 자신이 그랑프리를 2번이나 수상했던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마리 바실치코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베를린의 일 기 : 1940-45>는 니콜 키드만을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98년에 완성될 예정이다.
*왕퉁 (王童)
왕 퉁은1942년 중국 북동부 출신으로 1949년에 가족이 모두 타이페이 외곽으로 이주했다. 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쇼 브라더스 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해 여러 영화의 미술감독을 거쳐 1981년 <협잡꾼>으로 데뷔한다. 그는 다른 뉴 웨이브 감독에 비해 나이가 많았으며 낙후한 대만 영화계의 현장에서 자란 인물인데, 간결한 이야기 전개, 역동적인 영상 등 상업 영화 틀 속에서도 뉴 웨이브의 후광 없이 자수성가했다.
왕퉁(王童)은 평민희극 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독특한 개성의 감독이다. 1985년에 발표한<봄의 아버지 陽春老谷>는 대만 영화의 전환기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부자간의 정을 절실히 묘사했고 개방적인 시각에서 변혁기의 대만사회를 정면으로 묘사했다. <창가의 달은 볼수 없어 窓口的月亮不準看>(1980) <내가 진짜라면 假如我是眞的>(1981) <백점만점 百分滿點>(1981) <비련 苦戀>(1982) <바다를 보는 날 看海的日子>(1983) <말을 몰아 숲으로 가다策馬入林>(1984) <허수아비稻草人>(1987) <바나나천당香蕉天堂>(1989)
그후 그는 미술감독의 경력을 살려 탐미적인 역사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만 영화의 거목으로 인정받은 계기는 1987년작 <허수아비>에서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 로 이어지는 대만 역사 3부작이다. 특히 허수아비는 대만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웃음과 소박함과 풍자의 품격을 지닌 블랙 코미디로 대만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리안 (李安) 감독은 코미디라는 장르로 영화 속에서 자칫 진부해지기 쉬운 요소들을 드라마의 윤활유로 잘 활용하고 있다. <결혼 피로연 喜宴>(1994)으로 94년도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 <음식남녀 飮食男女>. 게이인 아들과 그의 남자 연인,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화해로 이끌어내는 <결혼 피로연 喜宴>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대만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었다. 94년에 만든 세 번째 영화 <음식남녀 飮食男女>는 음식으로 아버지와 세 딸 사이의 세대를 넘어서는 이해를 90년대 대만사회의 단절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이루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 해 깐느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채되었다. 이로써 그는 대만의 대표적인 배우 랑시웅과 함께 ' 아버지 삼부작' 이라 부를 만한 일관된 주제의 작업을 해냈다. 90년대 들어 유럽과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동시에 주목하는 유일한 대만감독으로 부상한 리안(李安)은 처음으로 중국(대만)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17세기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 시대극 <센스, 센서빌리티>(95)를 자신의 네 번 째 영화로 선택한다. 제인 오스틴의 원작소설 「이성과 감성」을 엠마톰슨이 각색 주연한 '미국 영화' <센스, 센서빌리티>는 96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오프닝으로 상영되었고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에도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만 감독과 미국의 자본, 그리고 영국의 원작소설과 영국배우들이 한데 모인 <센스, 센터빌리티>는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겨주었고(엠마 톰슨) 그 이후 리안(李安)의 행보에 대한 일대화두로 떠오른 듯이 보였으며 그 판단은 현재까지 옳다. 대만의 대표적 배우이자 여성감독인 장애가의 (소녀소어)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나 <센스, 센서빌리티> 이후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불가능한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맡은 리안(李安)은 지금 대만영화와 감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서 멀리 떠나 있는 듯이 보인다. 올 가을 미국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의 신작 <얼음 폭풍>(97)역시 '미국영화' 이며 73년 추수감사절을 지나면서 직장과 가정에서 위기를 겪게 되는 미국 중산층의 한 가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1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동장군의 한파를 맞이하는 이 백인 주인공의 고난처럼 영화제작 조건의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대만영화의 현실에 리안(李安)의 영화들은 한때 활로를 보여주는 듯했지만,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균형상태를 표현하고자 애쓰는' 감독 리안(李安)은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얼음 폭풍> 이후의 프로젝트를 이미 결정한 상태이다. 그는 자신이 그랑프리를 2번이나 수상했던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마리 바실치코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베를린의 일 기 : 1940-45>는 니콜 키드만을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98년에 완성될 예정이다.
*왕퉁 (王童)
왕 퉁은1942년 중국 북동부 출신으로 1949년에 가족이 모두 타이페이 외곽으로 이주했다. 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쇼 브라더스 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해 여러 영화의 미술감독을 거쳐 1981년 <협잡꾼>으로 데뷔한다. 그는 다른 뉴 웨이브 감독에 비해 나이가 많았으며 낙후한 대만 영화계의 현장에서 자란 인물인데, 간결한 이야기 전개, 역동적인 영상 등 상업 영화 틀 속에서도 뉴 웨이브의 후광 없이 자수성가했다.
왕퉁(王童)은 평민희극 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독특한 개성의 감독이다. 1985년에 발표한<봄의 아버지 陽春老谷>는 대만 영화의 전환기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부자간의 정을 절실히 묘사했고 개방적인 시각에서 변혁기의 대만사회를 정면으로 묘사했다. <창가의 달은 볼수 없어 窓口的月亮不準看>(1980) <내가 진짜라면 假如我是眞的>(1981) <백점만점 百分滿點>(1981) <비련 苦戀>(1982) <바다를 보는 날 看海的日子>(1983) <말을 몰아 숲으로 가다策馬入林>(1984) <허수아비稻草人>(1987) <바나나천당香蕉天堂>(1989)
그후 그는 미술감독의 경력을 살려 탐미적인 역사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만 영화의 거목으로 인정받은 계기는 1987년작 <허수아비>에서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 로 이어지는 대만 역사 3부작이다. 특히 허수아비는 대만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웃음과 소박함과 풍자의 품격을 지닌 블랙 코미디로 대만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