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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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1. 가야의 건국신화
1) 수로왕 신화
2) 이진아시왕 신화
3) 두 신화의 관계
2. 가야의 형성과 발전
1) 전기 가야 연맹
2) 후기 가야 연맹
3. 가야의 쇠퇴와 멸망
4. 유물로 보는 가야
1) 철기
2) 토기
3) 대성동 고분
4) 구지로 유적
5) 구산동 유적
6) 양동리 고분
7) 패총
5. 가야의 사회와 문화
1) 사회 : 여러 가야 소국의 연맹체의 상황, 연맹장의 권한, 신라 부체제와의 비교
2) 경제
3) 계급구조 : 사회 구조, 제정일치적인 면모와 그 한계성, 귀족 계급의 존재 여부
4) 의식주
5) 풍속 : 순장
6) 공동체 , 의례
6.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가야
1) 김수로왕은 김일제와 연관이 있을까?
2) 허황옥과 아유타국, 허황옥은 인도인인가?
3) 가야 불교는 언제 전래되었을까?
4) 가야에 여전사가 있었다?
5) 남제와 통교한 가라는 대가야가 아닌 금관가야였다?

결 론

본문내용

황제의 권위를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내부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주변제국으로부터 사절이 내조하고 책봉관계를 맺는 일은 皇帝權 확립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가라왕 하지는 남제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을 것이고, 남제는 원방(遠方)의 소국 금관가야왕 하지(질지)에게 어울리는 ‘輔國將軍本國王’에 책봉했던 것이다. (그림 설명 : 질지왕)
결 론
한국고대사는 다른 시대와 비교해볼 때 기록이 너무 부족하다. 부족한 기록으로 고대사의 원형을 복원하는 길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한국고대사 중에서 가야사만큼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역사가 없을 것이다. 가야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데 비해 그것을 기록한 사서가 별로 없어서 과연 가야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사용한 주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더군다나 가야의 기록이 부족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이웃 일본, 중국 기록을 통해 가야사를 복원해야 하는 실정이다.
가야 사료의 부족은 가야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어렵게 하고 있다. 이번에 가야에 대해 조사하면서 필자는 사료 부족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관련 서적을 참고해서 가야사의 원형을 복구했다고 자부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만큼 필자의 실력이 짧다고 할까?
이번 가야조사는 필자로 하여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가야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한국고대사의 한 축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당당히 활동한 가야를 사국시대의 범주에 넣지 않고 삼국시대의 부수적 산물로 여기는 건 가야를 배제하는 것, 우리 역사의 한 축인 가야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을 아직 학계가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삼국시대란 용어를 버리고 사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야의 역사적 실체를 보다 분명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기록이 별로 없다고 해서 가야를 사국시대의 범주에 넣기를 주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학의 태도가 아니라 본다. 가야는 기록이 부족한 대신 그것을 보완해주는 유물이 많기 때문이다. 유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역사를 생생히 전달해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야 연맹왕국은 결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설명하는 약소연맹국가가 아니었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를 망라해서 남한지역의 1/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지닌 연맹국가였던 것이다. 삼국과 한 시대에 공존했으며 통일 신라 직전인 6세기 전반까지 독자적인 문화와 대등한 외교, 자체적인 통치권을 가진 삼국과 동등한 위치의 강력한 왕국으로서 우리는 가야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야연맹체는 500여년간 한반도에 존속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의 발돋음조차 못해보고 허무하게 통합되어 버리는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비운의 국가이기도 하다. 강력한 왕권 확립이 되지 않았기에 6세기에 접어들어 삼국과의 경쟁에서 자연스레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야 연맹체에 속해 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국가가 발전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남아있는 고대 사료에서 가야사는 너무 미약하게 기록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는 식민시대의 일제에게 ‘임나일본부설’의 빌미를 제공했고, 우리는 이에 대해서 대응 할 수도 없을 만큼 그동안 가야사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연구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어쩔 수 없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던 『일본서기』에 상당부분 의지하면서 가야사를 탐구하는 형편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편만 남아있더라도 가야의 역사가 이러한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모에 대응이나 하듯 80년대 이후 옛 가야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고분발굴이 활성화되었고 우리는 출토된 유물을 통해 가야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옛 가야지역에 대한 고분발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이 남아있다.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는 입장에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또다시 역사침략의 대상으로서 가야를 놓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사를 순수한 목적이 아닌 역사전쟁의 수단으로서 연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다. 실재로 8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가야지역 고분발굴은 ‘임나일본부설’을 반증하려는 목적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는 가야사 연구는 또 다른 가야사 왜곡만을 낳을 것이기에 좀 더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가야의 비밀을 벗겨내길 당부하는 바이다.
≪참고문헌≫
◎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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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HD 역사스페셜2-적자생존 고대국가 진화의 비밀』, 효형출판, 2006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한국 고대사 산책』,역사비평사, 1994
◎ 사이트
가야문화연구소 http://todori.inje.ac.kr/~kaya/main.htm
철의왕국 가야 http://www.gayasa.net/gaya/index.html
  • 가격3,000
  • 페이지수39페이지
  • 등록일2009.01.04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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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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